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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이피는섬 Jan 20. 2018

퇴사 후 한 달,  동네 산책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시간

문득, 오래전 겨울의 일기를 꺼내 보다


2018년 1월 8일

회색 구름이 잔뜩 내려앉은 쌀쌀한 날. 산책길 4.3km


지난주, 한 달 전까지 다녔던 회사에서 외주 프리랜서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연락이 왔었다. 그리 나쁘게 나온 것도 아니고 회사에 대한 애정은 남아 있어서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간 고생했다고 회사에서도 이런저런 배려를 받아서 혹시라도 내가 필요한 상황이면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오늘 제안받은 일을 못하겠다고 전했다. 몇 달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인 데다 혼자 하기엔 작업량이 너무 많았고 시간도 촉박한 일이었다. 맡게 된다면 휴일도 없이 매일매일 시간에 쫓길 게 뻔한... 물론 그만큼 돈은 벌 수 있겠지만 그렇게 일하기엔 체력도 떨어졌고 무엇보다 그렇게 일하고 싶지가 않았다.

프리랜서라고 하지만 백수와 종이 한 장 차이 정도인 지금, 제안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냥 아직은 더 쉬고 싶다고 얘기했다.

돈만 생각하면 하는 게 맞는 일이다. 퇴직금이 그리 많지도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끝나면 다음 작업이 언제 의뢰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게다가 본래 외주 작업이란 조금 성가시고 시간이 급한 일을 맡기는 거라 앞으로 일이 들어오더라도 편안한 일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이왕에 회사까지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시작한 마당에 다시 일에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거절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얘기하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지난주 그 외주 제안을 받은 날, 친한 선배가 일자리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아는 곳에서 사람을 찾고 있는데 갈 생각 없느냐고. 이것도 참 감사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만큼 나를 믿어주고 내 상황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다. 하지만 아직 다시 직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선배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더 쉬고 싶다고만 말했다. 그래도 선배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저 지친 게 아니라 뭔가 뜬구름 잡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아무 말 안 했어도 선배는 현실적으로 똘똘하게 생각하고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저 웃으며 제발 나도 내가 똘똘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를 답답해하면서도 언제나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두 가지 일을 모두 거절하고 마음이 편하다 생각했는데 금세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시 치열한 삶을 살 자신이 없는 건 아닌지.


치열해지는 것이 두려운 건 아니다. 그저 지금 나에게 어렵게 내준 이 시간을 다시 또 애매하게 흘려보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면 다른 사람이 납득할 만큼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고, 내 브랜드를 만들어 출판을 하고 싶다고도 생각하고 있다. 무슨 글을 어떻게 쓰겠다는 거냐고, 출판사를 차릴 만큼 분명한 사업 계획이 있는 거냐고 물으면 그건 둘 다 아니다. 둘 중 어느 것도 쉬운 게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럼에도 내 계획은 이렇게도 막연하고 흐리멍덩할 수가 없다.


지금 내가 노력하는 건 내가 나를 몰아붙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큰 맘먹고 회사를 그만뒀지만 나도 모르게 벌써부터 조바심이 고개를 든다. 그 조바심을 애써 떨쳐내면서 나는 일부러 천천히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새로운 계획을 위한 엄청난 각오는 없지만 적어도 1년쯤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시간을 줘보자. 그게 지금의 내 분명한 계획이다.

나에게 시간을 준다는 건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일이다.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면서 동시에 오직 나만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나를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지 아니면 결국 실패하고, 똘똘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성실하고 치열한 직장인이 되어야 할지는 그때가 되면 결정하기로 하자고 나는 그렇게 나에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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