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급한 성격을 고쳐먹을 때.
요즘 수련에 소홀한 편인걸 인정하지 않으려 90분 아쉬탕가로 이번 주 수련을 마쳤다. 수련 후에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과 늦은 저녁 칼로리가 한 병에 밥이 한 그릇이라는 막걸리를 3병이나 마셨는데도 죄책감이 들지 않아 좋았다. 이걸 안 갔으면 어쩔 뻔했어. '얘를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어'와 같은 맥락이다.
7시 반 저절로 눈이 떠졌으니, 어제 썼던 근육이 쪼그라 붙어 짜는듯한 통증으로 장딴지는 하나로 엉겨 붙어 있고, 햄스트링은 세세한 갈래들까지 느낄 수 있었다. 어서어서 욕실로 가 뜨거운 물을 받자. 내 거친 머릿결과 불안한 탈모와 그걸 지켜보던 나.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케어뿐이라는 생각에 미용실에만 판다는 제품들을 구입했다. 탈모방지 샴푸는 최소 5분 이상 머리 위에 거품을 얹어두어야 하고, 헤어팩 역시 15분 이상 유지해야 하기에 이참에 이틀 동안 안 감은 머리에도 활력을 불어넣기로 했다. 20분을 참아내기가 고역인 줄 알았더니 인스타가 보여주는 훌륭한 알고리즘으로 그 이상의 케어를 해낸 것 같다. 머리에 타월을 훌훌 감고 나오는데 주방에서 물 마시는 소리가 났다. 머릿속으로는 남편이겠거니 했지만, 혹시나 아들일까 봐 "애기? 애기야?" 하며 가보았다.
물을 마시고, 아들은 뜬금없이 싱크대를 기어올라가 상부장을 열어 유심히 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어제 '엄마는 어버이날 선물로 율리우스 바리스타가 내린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어.' 했던 기억이 났다. 심혈을 기울여 플라스틱 컵을 집더니 ( 머그컵이 죄다 설거지 통에 있었으므로 ) 위태롭게 커피머신이 있는 싱크대를 기어올라갔다. 이제 아들 키 정도면 굳이 올라가지 않아도 기계에 손이 닿을 듯한데, 아기 때 기억이 장기저장된 것 같다. 그렇게 소중한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아이를 꼭 안아주는데 눈물이 왈칵 솟았다. 한때는 내 나이였을 우리 엄마 아빠와 언젠간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될 내 미래와 꼭 안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하나로 엉겨 붙어 가슴에서 쓰르르하게 저려왔다.
시부모님과는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지만, 멀리에서 각자 따로 사시는 친정 부모님은 뭘 해드려야 하나 고민했다. 어휴 이혼 안 했으면 얼마나 좋아. 공평하게 한해씩 격년으로 친정과 시댁을 오갔을 텐데. 풉! 웃음이 났다. 용돈을 보내드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육아휴직 일 년 동안 정지해둔 교원공제비용이 두배로 빠져나가는 상황이어서 월급은 스쳐 지나가는 추억이 된 지 오래였다.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열어 어버이날을 클릭했다. '영광 법성포 보리굴비 선물세트! 아빠는 혼자 사시니까 하나씩 쪄먹기도 좋고 보리굴비가 좋겠어.' 클릭하고 감사의 카드 60자를 곱게 적어 보냈다. 그 즉시 답 톡이 왔다.
- 고마운데 취소 바란다.
- 왜?
- 난 보리굴비가 별로야. 오서방이 좋아하니까 거기로 주소 보내라.
- ㅋㅋㅋ 오서방은 무슨. 내가 좋아하는 거야.
돈으로 보내기엔 금액이 적어 민망해서 선물로 보낸 건데 실패다. 취소하고 마이너스 통장에서 20만 원을 꺼냈다. 어버이날 이벤트 봉투에 담아 10만 원 송금하기를 눌렀다. 송금 완료가 뜨지 않고 계속 동그라미가 뱅글뱅글 돌고 있다가 멈췄다. 아빠를 닮아 성질이 급한 나는 송금하기 버튼을 다시 눌렀다. 이제 엄마 차례. 반신욕 마치고, 머리 말린 다음 전화해야지. 근데 통장에 돈이 없다. 아빠와의 카톡을 열어보았다. 사랑한다는 봉투가 두 개다. 아빠를 두 배로 사랑하니까 그런 거다. 허허허. 엄마껀데 다시 달라고 할 수 도 없고 허허허.
머리를 말리고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 구구절절 구구절절 이 얘기 저 얘기.
- 근데 말이야. 카카오페이 비밀번호를 누르라는데 생각이 안 나.
- ㅋㅋㅋㅋ. 계좌로 들어가는 줄 알았어. 미안해.
- 아니야. 딸내미가 준 돈인데 어떻게든 찾아볼 거야.
- 오서방 바꿔줄게.
- 구구절절 구구절절 이 얘기 저 얘기.
아빠와 통화를 마치고, 마이너스 통장에서 10만 원을 꺼내 엄마 계좌로 이체했다. 7월에 육아휴직 사후 지급금( 복직 독려 차원에서 육아휴직 급여의 25%는 복직 후 6개월 후에 합산해서 일시불로 지급한다 ) 받으면 엄마도 두배로 사랑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