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원조 닭사리
<클래스 101 *>에 내다 버린 돈이 많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마카 그림, 아이패드 그림, 펜 드로잉, 딥펜 캘리그래피 등등 이것저것 수강했는데 지속하고 있는 것이 없어서 하는 소리다. ㅋㅋ
일요일 아침, 제일 먼저 일어나 식탁에 오도카니 앉았는데 문득 '그림을 그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좋아하는 우리 동네 맛집 지도를 그리고 싶었다. 작게는 저녁식사를 대부분 아웃소싱에 의존하는 우리 집의 메뉴 선택을 위해서였고(집집마다 각자의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크게는 우리 동네의 작은 음식점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골목식 당적 마인드에서였다. 신도시의 비싼 임대료에,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맘 카페에, 2년째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까지 1년을 못 버티고 간판을 내리는 집들이 너무 많았다. 진심 '내가 인플루언서였으면..' 싶었다. 우리 시어머니가 '아빠 로또 맞으시면..'과 같은 맥락이다.
동네 오지라퍼로써 내가 최고로 애끼는 집은 '태백 원조 닭사리'이다. 테이블 4개 남짓한 노랑노랑 한 이 작은 식당은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있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오며 가며 괜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길 만큼 애틋하다. 음식을 담당하시는 어머니와 그 외의 일을 담당하시는 쾌활한 따님이 오손도손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면 저녁시간이 즐거워진다.
엄마 맛이 나는 이 집 밑반찬은 닭 사리가 끓기를 기다리며 한 입 두 입 먹다 보면 한 두 접시는 다 먹어버리고 만다.
새콤 달콤 아삭한 오이 무침이 기다리는 입맛을 돋우고, 맵지 않고 짭조름하니 달달한 윤기가 도는 멸치볶음은 아이 밥 위에 얹어준다. 매일매일 바뀌는 밑반찬이라 계절에 따라 식재료가 바뀌는데 그중 최고의 맛은 동치미 무로 만든 아작아작 씹히는 시원한 깍두기였다. 김치를 씻어먹던 유치원 시절에는 빨간 국물은 보기만 해도 매워서 싫다던 녀석은 이제 2학년 형님이 되어 빨간 닭사리국물 안의 구황작물은 모두 제 것이라 한다. 여름 가을에는 감자가 겨울과 봄에는 고구마가 들어있는데 우리 가족이 들어가면 홀과 주방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다.
- 엄마! 율리우스는 감자 좋아하니까 많이 넣어주세요.
- 그럼. 내가 알지. 많이 넣었어.
(이 글을 쓰면서도 태백 사투리가 음성 지원된다.ㅋㅋㅋ)
닭사리에 들어가는 야채는 미나리가 주로 들어가는데 어느 날은 향이 좋은 냉이가 들어있었다. 요즘 냉이는 하우스 재배라 본연의 향이 나지 않는데, 국물 안의 냉이는 어린 시절 동네 (강릉 즈므마을에 살았습니다)에서 논두렁 밭두렁에서 호미 들고 캐던 그 지극한 봄향이 가득했다.
- 요즘에는 이런 냉이 찾아보기 힘든데 어디서 사셨어요?
- 그거요? 시골에서 90 넘으신 우리 할머니가 엄마 식당에서 쓰라고 한 박스나 캐서 보내주셨어요. 아이고 할머니 허리도 아프신데, 뭘 이렇게 많이 캐서 보내주셨는지 아프실까 봐 걱정이에요.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냉이와 미나리를 한 움큼 집어다 육수와 함께 더 넣어주셨다. 맛을 아는 사람은 더 많이 드셔야 한다 하시며.
처음에는 없었는데 메뉴에 추가된 사리가 있으니 바로 '닭 내장'이다.
둘이서 먹기에는 22,000원 하는 '소' 자가 딱인데 이런 갓 성비 메뉴에 10,000원 하는 닭 내장을 넣을까 말까 (손이 작은 나는) 고민만 하다가, 친구가 놀러 와 완전체 어른 3인으로 '중' 자를 주문하고서야 궁금했던 닭 내장을 넣었다. 끓이면 끓일수록 닭 내장에서 우러나는 맛으로 국물 맛이 깊어지고, 꼬들꼬들하니 여자들이 좋아하는 식감의 닭 내장과 근육의 반대방향으로 썰어 씹기 좋은 모래집이 깊은 국물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었다. 이전에 먹었던 닭사리가 그냥 공깃밥이라면 닭 내장을 넣은 닭사리는 고슬고슬하게 갓 지은 돌솥밥이었다. 고슬하게 지은 쌀밥은 몸을 채우고, 꼬독하게 밥을 눌려 따뜻한 물을 부어 구수한 맛이 나는 눌은밥과 훈훈한 숭늉으로는 마음을 채우듯 닭 내장을 넣은 국물 맛은 몸과 마음을 모두 채워주었다.
우리 가족이 테이블에 앉으면
- 늘 드시던 대로 드려요?
- 네.
- 엄마 여기 닭사리 소자에 내장 추가요. 율리우스 왔으니까 감자도 많이.
그 다음 주문은 말없이 우리와 눈빛을 교환하신 후 후레쉬 한 병을 슬쩍 밀어 넣어주신다. 율리우스가 여기만 오면 술 많이 마신다고 엄빠의 주량을 단속하는 말을 들으시고는, 으레 두 병 마시면 한 병은 몰래 뒤로 빼돌려주실 정도로 우리와 쿵짝이 잘 맞는다.
- 엄마 내 메뉴는?
- 어? ㅋㅋㅋ . 닭갈비도 일 인분 주세요.
공깃밥에 밑반찬 올려주면 해결되던 유딩시절을 지나 이제 어엿하게 한 메뉴 담당하는 9살이 되어 '늘 드시던 대로' 메뉴가 추가되었다.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대로 닭사리 먹으러 가야지. '이제 올 때가 됐는데~ 하고 생각하니 왔다던' 포근한 어머니 사장님의 얼굴도 보고 싶고,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과 일주일간 독수공방 하며 2학년 학교 보내고, 구몬 시키고, 문제집 풀린 얘기랑, 고구마 다섯 개 품은 회사 얘기랑 보고 싶었다는 얘기를 해야 하니까.
* 클래스 101 : 준비물까지 보내준다는 온라인 교육 앱으로 원하는 시간에 앱을 켜면 수업을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