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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 Feb 25. 2023

하동 문학기행- 뜨밤부터 새벽까지

V 버킷리스트 37 - 2월 토지 문학기행 다녀오기(속편)

딸린 부자식 없이 훨훨 날듯이 떠나온 하동에서 오후일정(박경리 문학관& 토지드라마 세트장-저녁식사)이 마무리되었다. 인생사 일장춘몽이로구나. 자라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어도 그립고, 지나가는 시간만 야속하고, 거푸 사진을 들여다본다.(내 사진 예쁘게 나왔나?ㅋㅋㅋ)


쌍계사 옆 켄싱턴리조트에 짐을 풀었다. 수학여행 온 것처럼 6명이 한 객실을 썼다. 사실 나는 그리 털털하거나 쿨한 성격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을 쓴다는 사실이 꽤나 부담스러웠다. 업무 할 때 직접적인 전화통화보다는 카톡/문자 소통이 훨씬 편한 심리라고나 할까? 대면을 통해 상대방의 말투와 태도 속에 생략된 미묘한 감정선을 바탕으로 대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즉각적으로 변론하는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적인 사통팔달처리는 내 마음을 무척 불안하게 만든다. 반면, 카톡의 문자를 단순히 읽고, ’아직 못 본 척할 수 있는 1‘ 의 여유 속에 숨겨놓은 행간의 의미를 찾아 원문과 조합하고, 글자로 된 태도를 첨부하여 간단하게 텍스트 전송하는 인샬라 편도처리는 나의 불안감을 잠재워준다.


상대방의 말투나 태도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나 자신이 싫고, 그런 심리 때문에 불편한 내 마음과 싸우기도 싫고, 저 사람들은 서로 친한데 나는 따로 떨어져 외톨이같이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도 싫고, 나의 행동이나 말투를 보고 상대방이 오해하는 것도 싫고, 싫고, 싫고, 싫고. 그렇다. 나는 마음을 꽁꽁 붙들어 맨 폐쇄적 인간임을 고백한다.


숙소에 도착해서, 다음 일정인 이승윤 교수님의 ’ 소설 <토지>를 읽는 이유 - 1부 독후 만남‘ 에 들어가기까지 30분의 시간 동안 같은 방을 쓰는 조원들과 방으로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매주 줌을 통해  ‘토지 하부르타 독서토론‘을 하고 있어 그때 소그룹으로 만난 낯익은 선생님도 계시고, 내가 출석률이 저조해서인지 모르는 선생님도 계셨다.


멀뚱멀뚱 가방을 벗어놓고 뭘 해야 하나 앉았다 일어났다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선생님 한 분이 보글보글 물을 끓여 드립커피를 내려주셨다. 커피봉지를 뜯는 순간부터 커피 향이 식탁 위에 피어올라 거실을 가득 채웠다. 향기부터 비상한 이 커피의 비밀은 선생님 남편께서 섬섬옥수로 직접 볶볶하여 우리를 위해 바리바리 싸주신 것인데, 맛 또한 어찌나 좋던지!


갓 지은 밥을 석석 섞어 고소한 밥냄새가 피어오르고 쫀득쫀득 찰진 밥이 되듯, 맛있는 커피 향이 피어오르고 선생님들의 얘기를 듣고 내 얘기를 전하며 웃음을 석석 섞으니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던 멀뚱한 마음이 따뜻하고 윤이 나게 빛났다. 30분이 호로록  지나가버려 내심 강의 안 듣고 이렇게 얘기만 하고 싶었다는 ㅋㅋㅋ.

문학기행 일정에 이승윤교수님의 강의가 공지되었다.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쓰신 <10개의 공간을 따라 읽는 소설토지> 책을 읽었다. 앗! 스포 어쩔.


토지공동체는 20개월 대장정의 독서모임으로 현재 토지 5부 중, 1부 5권까지 진도가 나갔다. 5권의 책거리를 겸해 1부의 배경인 하동 평사리로 문학기행을 온 병아리 독자였기에 하동과 간도 두 개의 공간까지만 읽고 이 책을 덮었다. 다 읽어버리면 방사능 스포에 노출되어 남은 15개월을 찐하게 보내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 속에 소개된 이승윤교수님과 토지의 단짠단짠 콜라보가 재미있어 수업이 궁금했다.

진골 문과쌤이 말해주는 소설 ‘토지’와 작가 박경리 이야기에 노트를 4페이지나 썼다. 신영복교수의 ‘독서 3독’에 관한 글을 서두로 선생님의 강의도 그 독서법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었다. 오!̆̈ 스토리텔링 봐라. 역시 문과가 먼저다.ㅋㅋㅋ


삼독은 책에 담겨있는 텍스트의 의미를 읽는 것, 책을 쓴 필자를 읽는 것, 텍스트와 필자를 읽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읽는 것을 말한다.


작가와 작품을 기억하는 방법의 꼭지에 박경리 작가의 생애주기와 삶의 장소(서울-원주-하동-통영)가 소개되었다. 서울에는 처음 작품활동을 하신 ‘박경리 가옥(정릉 소재)’이 있는데 집주인과 얘기가 잘 안 되어서 기념 사업화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 외 삶의 장소에는 선생님의 시간을 따라 각기 다른 개성을 닮은 문학관을 짓기 위해 노력하신 이야기를 해주셨다. 제주도에 가나 경주에 가나 똑같은, 한라산에도 있고 설악산에도 있는 그런 개성 없는 기념품 같은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디테일을 영리하게 캐치하고 콘텐츠화 시키는 재미난 이야기에 푹 빠졌다. 나에게 이승윤은 문학계의 설민석이다.


사실 하동문학기행을 쓰면서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의 뜨거운 밤, 밤마실이다.

강의가 끝난 후 각 조는 각자의 방으로 닭튀김 한 봉다리와 탄산음료를 들고 가서 조촐하게 모여 담소를 나눴다. 나는 일정표대로 1시간쯤 담소를 나누겠지 싶었다. 원년멤버의 하부르타 입문기, 밤이 새도록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독서토론한 썰, 이름하여 야간비행.(12시가 넘어도 운전해서 집에 가야 되므로 ㅋ) 아이와 선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하부르타였다는 진지한 얘기, 선생님 남편이 취미로 커피를 볶을 수 있었던 정말 웃긴 얘기...‘좋은 선생님들과 같은 조여서 다행이다!̆̈ ’ 하던 차에 수형선생님께서

“그럼 이제 다른 방에 가서 다른 얘기도 들어봐. 거기는 또 여기랑 분위기도 다르고, 재밌는 쌤들 많아.

(수형선생님 경상어 패치가 붙어야 제 맛이 나는데, 토지를 표준어로 번역한 글마냥 멋도 없고, 선생님이 전해준 다정한 맛도 없어 안타깝다. 왜 박경리작가가 하동 평사리를 토지의 배경으로 택했는지 너무 알겠다.) 카톡을 톡톡톡 했더니 뜨거운 방번호가 공개되고, 거기에 대부분의 선생님이 모여 앉아 계셨다. 우리 조는 외려 밤마실 늦둥이였다는.


“선생님”

하고 부르면, 나를 향해 돌아보며 활짝 핀 꽃처럼, 스위치를 눌러 방금 켜진 LED 조명처럼 환하게 웃어주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10번이면 10번, 100번이면 100번 부를 때마다 너무 환하게 열려있는 선생님의 마음을 보고, 처음에는 ‘소 잃은 외양간처럼 저렇게 다 열어두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그러다 소 다 잃겠어요. 좀 닫아두이소.’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문으로 걸어 들어온 벅찬 행복을 닫아 걸기 싫어진다. 지금은 무슨 얘기로 그렇게 깔깔깔 재밌었는지 잘 생각도 안 나지만, 그 안에 머물렀던 소중한 시간들이 싫고, 싫고, 싫고, 싫었던 폐쇄적 INFJ를 좋아,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어떻게!̆̈ 로 바꿔놓았다.


우리의 뜨밤은 그렇게 흘러 새벽 4시가 되었고, 여럿이서 같은 방을 쓰는 게 부담스러웠다던 나는 방 3개, 넓은 거실도 있는 객실에서 굳이 다닥다닥 한방에 붙어 잤다. 어제 이승윤교수님이 얘기해 주신 꼭지 하나, 쌍계사에 입장료 안 내고 들어가는 방법을 우스개로 들었는데, 새벽에 쌍계사 산책 가실 뜨밤 멤버는 로비에 6시까지 모이자고 했던 말이 비몽사몽간에 나를 일으켰다.

가로등도 없는 새카만 새벽, 어둠을 깨문 작은달 아래 호기심을 잔뜩 품은 여자 넷은 겁도 없이 총총히 걸어 쌍계사로 향했다. 새벽이 주는 고요한 장막아래 우뚝 솟은 팔각구층석탑은 합장한 부처님의 손처럼 차분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 외엔 거의 보이지 않는 절을 더듬어 토지 속 탱화이야기에 나올법한 절간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싯다르타의 출가에서부터 해탈, 목련존자, 달마대사를 비롯한 제자(그 외에는 모르마미타불. 제자님들 죄송합니다.)들의 그림이 빽빽이 벽을 채우고 있었다. 혜관스님도 이런 그림을 그렸겠지? 이런 그림을 보며 자라서 길상이의 상상은 생과 사를 넘나들고, 구름에 달 가듯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일까?


하동 문학기행.

설레는 마음에 잠도 잘 못 자고 새벽에 일어나 서울역에 가닿아, 5시간을 달려 하동에서의 첫날 일정을 마치고 뜨거운 밤과 차가운 새벽을 맞이하였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오고 간 아름다운 문학기행.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가득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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