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문방구

소설 『토지』 와 문구컬렉션 #1 연필깎이

by 레아

우주 대하소설 『토지』 를 읽고 있다. 자랑스럽게도 재독 중이다. 이토록 긴 장편을 읽는 것도 처음이지만, 다시 재독 하는 것도 처음이다. 작가 박경리를 좋아하는 것도, 소설 『토지』 가 너무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함께 읽는 사람들이 좋아 재독을 한다. 이금희 아나운서가 “좋은 사람들은 모두 독서모임에 있더라.”라고 했던 말에 온 마음으로 공감하며, 그 속에 함께하고 있는 내가 좋다.

요즘 나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토지』 가 잊히지 않는 고전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이다. 언어 영역 시험지문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들이, 살아있는 가슴으로’라는 헌책방 아벨서점의 문구처럼 『토지』 속 글들이 숨 쉬며 우리 곁에서 살아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독서모임 선생님이 뜻밖의 제안을 해주셨다.


“토지 각 권에 어울리는 문구를 매달 추천해 주세요. 소설 『토지』 와 문구컬렉션. “


혹시 이 글로 단 한 분이라도 『토지』에 호기심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토지』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지만, 문구인으로서 문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주 대하소설에서 책상 위 소소한 문구들과 친구가 되어 예쁜 북마커도 달고, 여백을 가득 채운 메모장도 되고, 급하게 라면 받침대도 되었다가 문학기행 갈 때는 애착인형처럼 끼고 찍는 촬영용으로 휘뚜루마뚜루... 가볍게 마음먹을수록 완독에 다가설 수 있다.


토지 문방구 #1 (독서 페이지 : 토지 2권 19장 배추밭 풍경 ~ 3장 살려주십시오.)

토지 첫 문방구는 연필깎이다. 금손 소녀들은 커터칼로 하나뿐인 연필을 창조했지만, 나에게 금손은 티티샤파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교시절까지, 연필을 마지막으로 썼던 그때까지도 고장 한번 나지 않고 늘 곁에 끼고 있었던 것 같다.


연필깎이의 키워드는 ‘뿌리’이다. 연필의 뿌리는 매번 깎아내고 다시 돋울 수 있어서 좋다. 뿌리라고 하면 오래되고 변치 않으며 깊이 박혀 있어야 할 것 같아 어쩐지 부담스럽다. 나는 영원불변한 것보다 무엇이든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유연함이 더 좋다.


이번 독서페이지 분량에서 ‘뿌리’ 하면 ‘용이’가 떠오르는데, (나는 반용파이다) 그의 뿌리가 변치 않아서 싫다. 도리가 싫다. 매번 새로 깎아 마음을 돋우고, 흑심을 품고 사는 용이를 상상해 본다.


나는 오직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인생을 살아가려고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던가?

데미안



용이가 자신을 덧씌운 껍질을 매번 깎고 깎아서 자신의 흑심을 알아채길 바란다. 헤세처럼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부모님의 기대와 세상의 규칙에 맞서 제 속에서 솟아 나오는 열망으로 월선이와 바람에 이끌려 하얀 연이 날아오르듯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번 시차 문방구는 연필깎이이다. 우리도 매일 깎고 깎아 덧씌워진 껍질을 벗어버리고 우리만의 흑심을 알아채길 바라면서.



p.236

강둑에서 아이들이 연을 올리고 있었다. 바람이 구름을 다 날려버린 맑고 푸른 하늘에 하얀 소연이 둥둥 떠서 올라간다. 바람을 잘 잡아 올리는 연은 높이, 하늘 높이 얼레의 줄을 풀면서 올라간다. 사금파리 가루에 송진을 먹여서 철사같이 질긴 연줄이 풀려나가는 소리, 바람 소리, 물살이 이는 소리, 아이들의 눈은 흰 연을 따라 떠날 줄 모른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