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법

가후가 알려준 관계의 역설

by 아이스핫초코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책사들 가운데, 가후(賈詡)만큼 독특한 존재감을 풍기는 인물도 드물다. 그의 행적은 후대의 과장이 아니라 실제 역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능력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적과 친구’를 정확히 읽어내는 눈이었다.


결정적인 예가 있다. 원소와 조조가 결전을 앞두고 있을 때, 가후는 당시 자신이 모시던 장수에게 뜻밖의 조언을 건넨다.


“지금 조조에게 항복하십시오.”


그 당시 세상 사람 모두가 원소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장수와 조조는 피를 나눌 만큼의 원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후의 제안은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장수는 조조의 장남 조앙을 죽였고, 조조는 그 싸움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가후는 담담했다.


“원소는 당신의 항복을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지요. 그는 당신을 고마워할 겁니다. 자신의 도량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귀하게 대우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의 예상과 같았다. 조조는 장수를 극진히 환대했고, 심지어 사돈을 맺고 열후의 자리까지 내줬다. 조인의 위상마저 뛰어넘는 대우였다.


이런 일화는 또 있다. 겉보기에는 가족처럼 가까워 보였던 마초와 한수 사이에 질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꿰뚫어 일거에 분란을 잠재운 일. 자신을 극진히 챙기는 단외를 어느 날 갑자기 떠난 뒤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의 호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니 오래 함께하면 결국 충돌할 것”이라 설명한 일. 또 전쟁 중 유표가 장수의 가족이 전사하자 “유표는 당신이 복수할까 두려워하니 지금 휴전하면 가장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조언했고, 실제로 그렇게 된 일까지.


가후의 예리함은 인간관계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가까움이 부르는 갈등, 멀어짐이 주는 여유


관계란 묘하다.


가까우면 정이 쌓이지만, 동시에 원망과 경계도 쉽게 자리 잡는다. 매일 밥을 같이 먹는 사람끼리는 밥솥의 순서를 두고도 다투고, 젊어서 함께 고생한 사이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미숙했던 시절만 떠올라 어색해지는 법이다.


반대로 멀리 있는 사람은 다르다. 매일 부딪칠 일이 없으니 구질구질한 신경전도 없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걸 해주는 사람이 친구가 아니라 전혀 관계없던 남, 심지어는 과거의 적일 때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간다.


이건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정치술을 인간관계에 적용하자는 말이 아니다. 관계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유연함, 그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당연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친근함은 쉽게 무례함으로 변하고, 당연함은 소중함을 갉아먹는다. 그 순간부터 신뢰는 실망으로, 애정은 증오로 한순간에 바뀐다.


삼손에서 스티브 잡스까지, 무적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쓰러진 이유는 대부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습격 때문이었다. 굳이 먼 과거로 갈 필요도 없다. 오늘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많은 비극도 이와 다르지 않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서 오는 뜻밖의 기회


반대로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들의 가치를 지나치게 간과한다. 나와 다른 궤적을 걸어온 사람들, 다른 배경·다른 생각·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


나와 달라 불편하다는 이유로, 과거에 갈등이 있었다는 이유로 선을 그어버린다면 결국 남는 건 좁고 답답한 세계뿐이다.


중요한 건 결이 아니라 내공이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가오는 도움과 배신


관계를 대하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이것일지 모른다.


가장 귀한 도움도, 가장 치명적인 배신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온다.


가후가 살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 관계의 법칙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누구를 가까이 두고, 누구와 거리를 둘 것인지.

가후의 일화는 그 고민에 작은 힌트를 준다.


우리는 늘 관계의 역설 속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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