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우리 두려워하지 말자.
한국에서 연락하고 지내는 대학 동창 친구가 둘 있다.
전공을 불문하고 뽑아주는 회사가 많은데도 불문과 출신인 우리는 모두 가정주부다.
차로 친정으로 가는 길, 30여 분의 주행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Bonjour! Comment ça va? (봉주르, 꼬멍 사 바?)"
오래간만에 불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첫 마디 "하지 마!"
한바탕 웃으며 우리의 수다는 시작됐다.
아이들은 잘 지내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친구가 부끄러운 듯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나 대학에서 외국인들에게 하는 한국어 강의를 하게 될 것 같아"
"진짜야? 이야, 잘 됐다, 축하해!"
나도 현재 한국어 교사 양성과정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고, 이제 4과목만 수료하면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친구 둘은 나보다 먼저 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받은 상황이라 일만 시작하면 되는 거였다.
"나 그런데 자신이 없어. 너무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안 한 것 같아.
아침에 일어나서 매일 어디로 가는 생활을 안 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자신이 없어."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가정주부로 지낸 우리는 기회가 왔을 때 겁부터 먼저 낸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새로운 업무를 지시받은 적이 있다. 금감원에 제출하는 전자공시 업무를 혼자서 맡아 하게 된 것이다. 거래소든 코스닥이든 상장된 회사들은 금감원 전자공시 시스템을 통해 회사의 중대한 사안이나 분기별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 숫자나 내용에 실수가 있는 경우 다시 정정공시를 해야 하고 그 경우엔 회사 이미지에 좋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신경 쓰이는 중요한 업무였다.
혼자서 하기엔 업무가 너무 커 보여서 겁이 났다. 잘 해내지 못할까, 회사에 누를 끼칠까 두려웠다.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맡아 했는데, 내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졌던 그 일이 하면 할수록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실수하지 않도록 꼼꼼히 여러 번 확인해야 하는 중압감은 여전히 있었지만 말이다.
그 뒤로 두려운 일이 있으면 그때를 생각한다. 일단 시작해 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라고 친구에게도 그 얘기를 해 줬다. 친구는 조금 용기를 얻는 듯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돈을 받지 않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외국인 친구에게 무료로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어도 내 시간을 내서 하는 거라 급한 일이 생기면 수업을 취소하게 된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의 자세도 달랐다. 돈을 내고 배우는 사람은 돈을 냈기 때문인지 더 열심히 배웠다. 그 뒤로 나는 정당한 대가를 받고 가르치고 있고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일 년 넘게 고생해서 취득한 자격증인데 난 네가 정당한 대가를 받고 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너도 더 열심히 준비하고, 또 뭔가 이뤘다는 성취감도 생기고."
"막상 하려니까 걱정도 되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굳이 이 일을 하나 싶어."
"물론 이 일을 안 해도 넌 잘 살 수 있지. 근데 네 딸을 생각해 봐. 그 아이가 뭔가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쉽게 포기해 버린다면 넌 뭐라고 충고해 줄래?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많이 배우는 것 같아. 용기를 내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에게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엄마가 한 것처럼 잘 이겨낼 거야. 이제 슬슬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줄어들 테고, 너만의 일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 좋은 기회가 왔는데 저버리지 말고 해봐. 넌 이제 더 이상 너만의 네가 아니잖아. 멋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줘."
“그래, 내가 잘 하면 다른 친구에게도 좋은 기회를 만들어줄 수도 있고.”
“그럼 더더욱 훈훈하지.”
친구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 아이들을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싶고 자랑스러운 엄마이고 싶다.
두려움이란 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가정주부로 오래 지낸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용기인 것 같다. 두려움 앞에 당당히 맞서는 힘. 힘에 부치거나 무섭더라도 옳은 일을 선택하는 힘. 얼마 전에 필사한 버츄카드의 '용기'를 생각하며 친구에게도 이 용기가 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