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미크론.
오 씨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미크론.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설픈 희망은 언제나처럼 예상을 뒤엎는 법.
코로나가 아주 심했던 2020년 초를 제외하고 우리 가족은 꽤 정상적인 생활을 했었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사무실에 나갔고, 학생 수가 적은 규모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2020년 6월부터 방학을 제외하고 매일 학교에 다녔다. 난 방역수칙에 따라 적은 수의 친구들을 만났고, 수업도 했고, 가고 싶은 전시회도 잘 다녔다. 해외에 있는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을 못 만난 지 2년이 넘은 것과, 독일의 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보지 못 한 일을 제외하고는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는 일도, 어딜 가나 QR 체크를 하는 것도, 가끔 있었던 온라인 수업을 아이들 스스로 능수능란하게 준비하는 모든 것이 익숙해져갔다.
오미크론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갑자기 확진자가 늘더니 학교에서 저학년을 위주로 코로나에 걸리기 시작했다. 백신을 맞은 6-7학년부터는 감염 사례가 거의 없다가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들이 걸리면서 형제들과 가족들 역시 하나둘씩 걸리고, 무서운 속도로 확진자가 늘어났다. 학교에서 날아오는 이메일의 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있는 5학년에 감염자가 속속 나와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7학년인 아들 녀석이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날 목이 아프다고 했다. 딸아이도 두통이 있고, 나 역시 목이 칼칼해서 선거일에 다 같이 PCR 검사를 받았다. 나와 딸은 모두 음성, 아들은 양성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아들의 증상이 심하지 않아 방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으며 나오지 말라고 했다. 혼자 방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는데도 민낯을 친구들에게 보이는 게 어색하다고 굳이 마스크를 쓰는 기이함을 보이던 아들은 배가 고프다고 불쑥 나오거나 프랑스어 질문이 있다고 나오고, 또는 심심하다고, 혹은 우리가 뭐 하는지 궁금하다고 나오기를 반복했다. 이틀 정도 아들을 격리시키다 계속 혼자 방에 두는 것도 불쌍하여 격리를 포기했다. 우리 가족 네 명은 함께 코로나에 걸리는 사이좋은 운명공동체가 되기로 했다.
함께 걸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한 녀석이 회복할 때쯤 다른 한 녀석이 걸리고, 아이들이 회복할 때쯤 아빠가 걸리고, 그들의 수발을 잘 들다가 엄마가 막판에 걸리는 비극적 결말. 한 달이 넘도록 회사에도, 학교에도, 마트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 콕 박혀 있는 시나리오였다.
아무리 운명 공동체라 했지만 자신이 코로나에 걸린 것을 망각하고 다정하게 엄마 볼에 뽀뽀한 아들의 탓이었을까? 내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토요일 아침에 난 목이 아프고 컹컹 소리를 내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땅으로 쑥 꺼지듯 축 처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평소에 손 하나 꼼짝 안 하고, 장 보는 것을 세상 제일 싫어하는 인터내셔널 꼰대 남편은 내가 너무 아팠던 토요일 저녁엔 어쩔 수 없이 식사를 레스토랑에서 픽업해 오고, 식탁을 차리고, 심지어 설거지까지 했단다. 그 정도 도와주는 아빠들이 수두룩한 요즘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아픈 나에게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는지.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가 싫어 그것을 피해 외국인과 결혼을 했더니 사실은 외국인의 탈을 쓰고 조선시대에서 튀어나온 어설픈 양반과 결혼을 한 셈이었다.
오미크론의 증상도 나를 힘들게 했지만 더욱 나를 힘들게 한 것은 허리의 통증이었다. 평소에 길게 자지 않던 사람이 이틀을 많이 잤더니 허리가 아파서 쉬고 싶어도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난 아픈 와중에 잘 자기 위해 허리에 좋은 운동을 검색해서 스트레칭까지 해야 했던 서글픈 환자였다. 주말에 힘이 없어 PCR 테스트를 하러 갈 수 없어 월요일에 갔더니 화요일에 확진 문자를 받게 되었고, 그 주 수요일부터 학교를 나갈 수 있었던 아이들은 또다시 꼬박 일주일을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앞으로 줄줄이 시험 스케줄이 있었던 아이들. 엄마가 확진되었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엄마의 안녕을 걱정하기보다는 학교에 안 가도 된다는 사실에 해맑은 미소와 함께 만세를 외쳤다. 독립투사가 된 듯 당당한 저 녀석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저것들이 내 자식들이다. 불타는 수박을 낳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려준 바로 그 녀석들.
5일 정도 아프고 나니, 목요일부터 몸이 많이 좋아졌다. 2차 백신을 맞고 두 달간 목소리가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오미크론에 미각과 후각을 잃었다. 염통머리 없는 오미크론은 얄밉게도 식욕은 앗아가지 않았다. 주문해 두었던 맛있는 치즈와 살라미, 부어스트, 빵, 간식들이 속속 도착하고, 아이들이 갑자기 배가 고파도 이젠 걱정이 없다. 쌓여있는 포장 쓰레기를 보면 환경에게 미안해 고개가 숙여졌다. 배달보다는 직접 장을 보러 다녔는데, 코로나에 확진이 되면서 음식을 배달시키고, 식재료를 주문하니 포장 쓰레기가 넘쳐났다.
금요일 오전, 나의 확진으로 다시 한번 PCR 테스트를 했던 딸아이와 남편의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었다.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아니라 증상이 상대적으로 경미한 오미크론에 걸린 것과 아들에게 심한 증상이 없었던 것에 감사한다. 확진 날로부터 45일간 면봉으로 코를 쑤실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아들과 나는 하이 파이브로 기쁨을 나눴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학교로 가고, 남편은 직장에 간다. 자유롭게 밖에 나갈 수 있는 이 자유에 감사하며, 마트에 갈 준비를 한다. 봄날의 처녀처럼 어느 때보다도 기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