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버지는 치매라서 좋겠다

떠돌이

by 열정의 개척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은 완전히 해체 되었다. 아버지는 집을 팔아야 한다며 시집 간 누나를 제외한 우리 남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이 집을 팔아 자신의 여관 나머지 대출금을 갚고 싶어 했다. 누나는 동생과 사업 구상을 했고, 매형과 함께 세 명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동생은 누나와 함께 살기로 했다. 문제는 나였다.

‘너 어떻게 하냐?’


걱정을 듣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동생을 책임지기로 했는데 나까지 더부살이 하는 건 매형에게 면목이 없었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이라면 기숙사를 신청했을 텐데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몇 달 살기 위해 원룸을 구할 수도 없었고 가격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 갈 곳이 없어 우선은 친구 자취방으로 갔다. 친구에게 매달 내가 줄 수 있는 금액은 10만원뿐이었다. 제발 그 돈으로 살게 해 달라고 졸랐다. 대신 일주일에 나흘만 밤에 들어와 잠만 자겠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 쇼파에서 잠을 자고, 실험실에서 자고, 주변 교회 새벽기도실에서 자고, 빨래방 구석에서 잠을 잤다. 친구 자취집에 들어가는 날에도 도서관에서 10시까지 있다가 들어가 조용히 잠을 잤다. 서럽지도 않았다.


‘아버지 이름의 집에서 더 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집이지만 그래도 당신 이름으로 된 집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떠돌이로 돌아다니는 건 내 능력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하루 세끼를 다 먹지 못해도 그건 내 능력의 문제였다. 버스비가 마침 다 떨어져 걸어 다니는 일이 있어도 연락할 곳이 하나도 없는 것은 이제 엄마가 없는 사람의 숙명이었다. 난 엄마없는 애였다. 그래서 지금도 난 버릇처럼 아내에게 말한다. 나중에 꼭 내가 먼저 죽어야해. 당신 오래 살라는 말이 아니야. 자식에게 아빠는 없으면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엄마가 없으면 세상 모든게 사라지는거야.


그렇게 몇 달을 버텨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렇게 살면서 유일하게 서러운 날이 바로 명절이었다. 지금은 명절에도 평일처럼 장사하는 분들이 많지만 그때에는 명절 연휴기간에는 문을 연 식당들이 없었다. 기숙사도 문을 닫는 날이기 때문에 정말 빈 곳을 찾아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명절 오후가 되면 시댁에 다녀온 누나가 동생을 데리고 와 중국집 가서 같이 밥을 먹고 헤어졌다. 그게 우리의 인사였다. 또 반년을 살아냈다는 안부였고 다시 반년을 살자는 약속이었다.

대출이 사라진 아버지의 삶은 홀가분해 보였다. 여행도 다니면서 내연녀 아이들이랑 잘 살고 있는 듯 했다. 동갑인 내연녀 아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친구를 통해 가끔씩 소식을 들었다. 대학원에 들어온 나와는 다르게 일찍 취업해서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혼주의 자리에 앉으니 우리에게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했다. 도대체 얼마나 뻔뻔해지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참석 못하겠다는 말에 아버지는 매일 누나와 동생의 가게에 전화를 하고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겠냐며 난동을 피웠다. 누나가 너무 힘들다는 말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알았어요. 제가 갈께요. 누나와 동생은 주말에 장사해야죠. 장사꾼이 주말에 문 닫으면 손님 떨어져요 대신 제가 갈께요”


그 말에 아버지는 만족하셨다. 장남이 내연녀 아들 결혼식에 오니 다른 사람들에게 면목이 서는 듯 했다.


결혼식은 참 예뻤다.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아버지를 칭찬했다.


“참 대단해. 재혼한 사이인데 아들에게 전셋집도 해주고 차도 사주고 훌륭한 아버지야”


속으로 수 백번을 대답했다.


‘그런데 전 잘 곳이 없어 떠돌고, 밥 못 먹을 때도 많아요. 그리고 재혼한 사이도 아닙니다.’


결혼식이 빨리 끝나길만 기다렸다가 고모와 작은아버지에게 인사만 하고 나왔다. 다들 왜 오셨나 묻고 싶었다. 아버지가 억지로 불렀나? 아니면 저 분들은 이제 엄마랑은 인연이 끝난 사람들인가? 그게 바로 시댁이라는건가? 죽은 사람만 억울한건가? 당신들 겨울이면 우리 엄마에게 김장 300-400백 포기씩 부탁하고 일요일에 얼굴만 비치고 가져가던 사람들이잖아. 미안함도 없나. 당신들 때문에 우리 엄마 일찍 죽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난 그 이후에도 집안 일이 생기면 끌려가서 자리를 채우고 언제나 과묵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만나면 꼭 듣는 질문이 있다.

“너 어디사니?”

“공부 잘 하더니 좋은 곳에 사네”


또 속으로 대답한다

‘아버지 나이 50에 아직도 저 월세 살아요.’


아버지는 치매라서 좋겠다.

이제 기억은 나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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