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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 Sep 05. 2024

01. 우연과 노력의 교차로

가난을 딛고 싱가포르 해외 취업 성공까지

저는 한때 소위 말하는 부잣집 딸이었습니다.

90년대 초반, 저희 집에는 콩코드 세단이 있었고, 섬유 공장과 서울에 빌딩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세일러복을 사 오셔서, 유일한 딸인 저를 기쁘게 해주셨지요.


하지만 부잣집 딸로서의 삶은 제가 일곱 살 때 끝이 났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콩코드 자동차,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비슷하게 생겼어요.

가족의 보증 실수로 인해 저희 집은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유치원에 가던 어느 날 아침, 세입자들이 저희 집 문을 막고 소리 지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치원 졸업 날에도 세입자 중 한 아주머니를 피해 화장실에 숨어 울었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는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많았습니다.


제 부모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부 노점, 인테리어 가게, 뉴스킨 다단계, 꽃 장사, 꼬치 장사, 각종 음식정 등 다양한 일을 하시며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전의 부유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영화 보러 가기로 한 약속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돈이 없었거든요. 그때 어린 마음에 울면서 생각했습니다. ‘왜 부모님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시는데도 우리 집에는 돈이 없을까? 돈은 도대체 어떻게 버는 걸까?’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시급 천 원 조금 넘는 금액을 받으며 한 달 내내 일했지만, 손에 쥐어진 금액은 약 십만 원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로는 많은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퇴근길에 삼성역을 지나가는 직장인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 같은데,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질문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저는 서울의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3년 동안 주말에도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했습니다. 마침내 서울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했습니다. ‘내가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더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은 영어였습니다. 어학연수를 알아보았지만, 집안 형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교수님의 도움으로 영국의 갭이어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원했고, 자기 소개와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녹음해가며 면접을 준비했습니다. 다행히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는 1년 동안 영어로만 소통하며 영어 실력을 키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해외에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어로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저와 잘 맞았고, 해외에서의 삶을 꿈꾸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돌아온 후 토익 시험을 보고,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취업에 성공했지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이른바 '유리 천장(Glass Ceiling)'에 부딪힌 것입니다. 학연, 지연, 혈연이 있는 친구들이 그 네트워크를 통해 쉽게 입사하고 승진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던 중, 첫 직장의 멘토였던 분이 외국계 기업의 마케팅 부서 자리를 제안해주셨고, 사수의 지원과 준비해 둔 영어 실력 덕분에 그 자리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계약직으로 입사한 저는 어떻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1년 뒤, '이 달의 우수 사원'으로 뽑히고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올 해의 최우수 사원'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013년, 송년회에서 받은 올해의 최우수 사원 트로피

그러면서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부 지원 비자를 신청했고, 그 역시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저는 영국 대신 싱가포르로 가게 됩니다. 싱가포르인인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저와 비슷한 가치관과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것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또한, 영어를 좋아했던 저는 남편과 결혼하면서 평생 영어로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행복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싱가포르 지사에서 오픈된 자리를 알아보았고, 세일즈 포지션에 지원하여 면접을 본 끝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싱가포르로 해외 취업을 하며 글로벌 무대로 한 발짝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나, 해외에서의 삶을 꿈꾸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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