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욱 쉬세요.
한국에서 일할 때, 저는 겨울에 한 번씩 심한 독감에 걸리곤 했습니다. 집 근처 내과에서 약을 처방받고, 약을 먹은 뒤 다시 출근했던 기억이 납니다.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을 먹는다는 ‘공식’ 같은 것이 늘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요. 싱가포르에서 일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고, 심할 땐 MC(Medical Certificate)를 받아 하루나 이틀 정도 병가를 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싱가포르 지멘*에서는 1년에 12일의 병가가 주어졌는데, 연차와 비슷한 수준의 병가가 있다는 건 큰 혜택이었습니다. 병가를 쓰려면 반드시 MC를 제출해야 했고요.
반면 독일의 병가 문화는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독일에 도착한 시기는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때였고, 환절기 감기로 고생하는 동료들이 꽤 많았습니다. 제가 처음 일했던 오피스는 오래된 빌딩이라 난방이 라디에이터였는데, 건조한 실내 공기는 호흡 기관에 더 무리가 되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출근해 보니 제 앞자리에 앉던 동료 마커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커스에게 무슨 일이 있니?” 하고 다른 동료에게 물으니, “응, 마커스는 몸이 안 좋아서 쉬기로 했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동료가 덧붙였죠. “몸이 안 좋을 땐 그냥 매니저에게 말하고 쉬면 돼.”
싱가포르에서의 ‘MC 제도’가 떠올라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의사 소견서를 제출해야 하니?”
돌아온 답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아니, 3일까지는 의사 소견서가 필요 없어. 3일이 지나도 계속 아프면 그때 병원에 가서 의사 소견서를 받아 회사에 제출하면 돼.”
몸이 안 좋으면 1~3일은 그냥 집에서 자가 회복을 우선한다는 문화. 사실 이게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일 동료들은 웬만해선 진통제도 잘 먹지 않았습니다. 물을 많이 마시거나, 감기 기운이 오면 뜨거운 레몬생강차를 끓여 마시곤 했지요. 카자흐스탄 출신 동료는 생강과 레몬을 직접 썰어 넣어 말 그대로 ‘진짜’ 레몬생강차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싱가포르에서 감기약과 항생제를 바로 처방받던 제게, 몸이 스스로 회복하길 기다려주는 문화는 새롭고도 흥미로웠습니다.
당시 저는 계약직으로 팀에 합류한 상태라 “아파도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기침이 너무 심해 약까지 사 먹고 출근했지만, 건조한 공기 탓인지 기침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 기침하며 일하고 있는데 한 독일 동료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몸이 안 좋은데 나와서 일하는 건 비효율적이야. 그리고 네가 바이러스를 옮길 수도 있으니까 집에 가서 쉬는 게 좋아. 하루이틀 쉬고 나서 회복된 상태로 다시 오면 모두에게 더 나아.”
저는 정말 당황했습니다. ‘내가 집에 가서 쉬는 것이 팀에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얼굴이 뜨거워지고, 다른 동료들도 같은 표정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결국 용기 내서 매니저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매니저는 바로 답장을 줬습니다.
“집에 가서 푹 쉬고 와. 걱정하지 말고, 빨리 낫길 바랄게.”
그렇게 저는 생애 첫 ‘독일식 조퇴’를 했습니다. 매니저의 말대로 이틀 푹 쉬었고, 노트북도, 회사폰도 보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쉴 때는 정말 쉬어야 한다”라고 거듭 말했거든요. 충분히 자고, 물을 많이 마시니 몸이 금세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조금 아프면 과감하게 쉬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한편으로는 건강 관리도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병가 제도를 남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주로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아프다는 동료가 생기기도 했고, 큰 프로젝트의 go-live를 앞두고 갑자기 병가를 내고 나타나지 않는 동료도 있었습니다. 그 동료는 비슷한 일이 반복되어 팀 내 평판이 좋지 않았지요.
특이한 사례도 있습니다. 새롭게 부임한 부서장이 고압적인 스타일이라 팀 분위기가 크게 흔들렸던 적이 있는데, 그와 갈등이 많던 동료 한 명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유로 장기 병가를 내고 약 6개월 동안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복귀 후에는 결국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다른 부서로 이동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정신과 의사의 소견으로 장기 병가가 가능하고, ‘번아웃(burn-out)’ 진단 역시 정식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됐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경험한 독일의 병가 문화를 소개해보았습니다. 혹시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에 남겨주세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늘 감사드리며, 다음 글에서는 회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고’와 그에 대한 ‘대처법’에 대해 이야기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