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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풀 Apr 11. 2022

취업 역량과 대학 전공

비대면 수업과 교감

 “요즘 세상에서 ‘호의적’이고 ‘정직’하며 ‘공정’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대단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학은 그런 인간적 자질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 기관이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 어른이 된다는 것, 42쪽)


 한국 고용 정보원이 조사 발표(2016)한 자료에 따르면 구직 역량별 교육 요구도는 직업윤리, 도전 정신, 자기 이해, 긍정적 가치관이 상위 1,2,3,4위를 차지한다. 반면에 외국어 능력은 인사담당자들 평가에서 20위로 맨 하위로 나타났다.

 

직업윤리는 어느 전공에서 제일 잘 가르칠까? 국민 윤리학과? 글쎄다. 도전 정신은? 자기 이해나 긍정적 가치관은? 이들은 특정 학과가 아니라 대학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는 역량이다. 

앞서 인용한 우치다 타츠루의 글 또한 대학 교과과목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이렇게 키운 역량에 대한 평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곧, 학점이나 토익 혹은 각종 스펙으로는 미처 드러나지 않는 기업의 채용 기준을 문제 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학 교육과 기업 역량 사이의 간극은 성분이 아니라 측정의 미스 매치란 생각이다. 

연예인들 사이에 카메라 마사지라는 표현이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촌스럽던 외모와 복장에서 세련미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대학에도 역시 캠퍼스 마사지가 존재한다. 개인 간 차이는 있지만 알바나 연애로 얼마간 수업에 불충해도 캠퍼스를 밝은 세월은 외모와 언어에서 교양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동료, 선후배들 사이의 이러한 횡적 묻어남에 비해 교수와 학생 사이의 종적 묻어남에 의한 인성- 기업이 바란다는 역량-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일차적 원인 제공자는 의당 선생이다. 

“요즘 애들이 공부를 도통 안 해”라는 선생으로 서의 지적은 수업 준비의 소홀함을 비껴갈 순 있을지 모르지만 캠퍼스 마사지에 보태야 할 지성, 인격, 품위, 교양, 예절 등의 부재는 누굴 탓할 것인가?


 그나마 대면 수업에서는 유교적 권위주의 잔재로 비인간적 불손은 드물었다. 하지만 비대면 상황에서는 그 조차도 기대하기 어렵다.  비대면 수업 시 음소거나 화면 중지는 수업권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한다. 그럴 때면 “지금은 학생이니까 얼굴을 안 보여도 되지만 졸업하고 사회 나가서 상사와도 그럴 수 있을까?”하는 정도, 그 정도 지적이다. 더 이상은 강요할 수 없다. 교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옛 성현처럼 신독(愼獨)이야 못해도, 복장은 마음 가짐이다. 비대면은 그 지긋지긋한 권위주의를 날려버린다. 그렇다고 권위를 방기(放棄)하는 건 선생이기를 포기(抛棄)하는 것이다. 

 비대면에서 학생 다움과 선생 다움을 유지하는 길이야 말로 전공 지식 전달을 넘어 사회(기업)가 기대하는 소양과 태도를 함양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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