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도 해야 할 일

은퇴학 입문서

by 밥풀

아는 게 좋아하느니만 못하고 좋아하는 게 즐기느니만 못하다(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마도 공자님 말씀일 게다. 이 말에 빗대어 나도 교단에 있을 때는 학생들에게 해야만 하는 일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권면하곤 했다. 그리고 은퇴한 지금, 통열히 반성한다.


왜?

좋아하는 일이 뭔지 뭐가 하고 싶은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교수는 종신 보장(tenure)으로 정교수로 임용되는 순간 정년퇴직 일자를 보장받는다. 만 65세가 되는 8월(6월 이전 생일자) 혹은 익년 2월 말로 임명장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은퇴 시기를 명확히 알고 또 그런 만큼 은퇴 후 준비에 철저할 수 있다.

이게 패착이다.

대학에 오기 전 회사 생활하면서도 몇 차례 이직 경험이 있고 또 전공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인지라 나름 전략적 사고에 익숙하다고 자부했건만 은퇴 전 이직과 은퇴 후 삶은 전혀 다르다. 그리도 뚜렷하던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보이질 않는다. 은퇴를 하면 젊어서 가보고 싶었던 이곳저곳을 여행해야지 했는 데 당최 공항이 당기질 않는다. 의욕저한가? 노환가? 공항이 먼 곳으로 이사를 와선가? 국내 정치 상황 때문인가? 뭔 이유를 들이대도 명쾌하지가 않다.

그리곤 문득 깨닫는다.

나이 들어서는, 은퇴하고 나서는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하기 싫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할 때라는 것을… 이를테면 병원 가는 일, 물리치료받는 일, 때로 무료하고 적적하게 시간 보내는 일, 젊은이나 사회로부터 소외감 느끼는 일, 시간 내서 더 나이 든 선배나 일가친척을 찾아뵈는 일, 그토록 열심히 모았던 책이나 소장품들을 나누거나 줄이는 일 등등 하나같이 은퇴 전에는 싫어하거나 내키지 않던 일들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스캇 팩 박사가 쓴 아직도 가야 할 길(Roadless Travelled)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난다. 초고령 사회에 들어 선만큼 은퇴 후 삶은 족히 2~30년이다. 만만치 않은 시간이다. 이 긴 시간에 대한 안내서가 전무하다. 은퇴 4년 차다. 은퇴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다른 질서, 다른 가치가 지배한다. 은퇴학 입문서 같은 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내가 함 써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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