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밥풀 Oct 31. 2021

왜 일하는가?

생존을 넘어 생활로

자기소개에 적은 글로 인해 적잖은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80년 대는 그야말로 한국 경제의 황금기였다.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10%를 상회하였고 나처럼 졸업 학점이 시원치 않은 사람조차도 두세 군데의 대기업에 복수 합격이 가능하던 시절이다. 그러니 요즘처럼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취준 생들에게는 전혀 딴 세상이거나 속 뒤집히는 얘기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쉬웠는 데 지금은 어려운 이유가 뭘 까? 경제 불황으로 인한 고용 난 때문이라고 쉽게 답할 수 있다. 맞다. 경기 침체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세계적인 현상이며 한두 해 전에 비롯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근자에 코로나 19로 좀 더 심각해지는 국면이 없지 않지만 그 시작은 20년도 더 전인 국제 금융 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료를 뒤져보면 IMF 이후 우리의 고용 여건이 나아진 적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그동안 계속 불황이었나?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가들의 무능이었나? 기업들의 경영 실패인가? 부분적으로는 고 이건희 회장의 지적처럼 이들 요소들이 그 책임 소재로부터 전혀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짧게는 고용 시장의 공급이 수요를 좇아가지 못하는 일자리 수급의 문제요 길게는 일 혹은 일자리라는 직과 업에 대한 재해석이 불가피한 시점을 지나고 있다. 고용 시장의 경우 디지털 혁신은 가공할 속도로 사람들의 일자리를 지워 나간다. 200년 전 산업 혁명 때 증기나 전기 발명으로 인한 기계화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리고 이 속도는 앞으로 더욱더 가속화할 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바야흐로 일 곧, 직과 업에 대한 의미를 되새길 때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때 고용과 실업의 문제 또한 그 정의와 구분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 산업 혁명 이전만 하더라도 생산과 소비 혹은 고용과 실업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 농업사회를 돌아보면 의식주를 자체 해결하는 일인다역의 시대요(이런 의미에서 폴리 매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 논의하자) 생산자가 곧 소비자인 프로슈머였다. 게으른 자식이라도 실업으로 내몰지 않고 밥은 먹여 주었다. 이미 시작된 4차 산업혁명이 주도하는 오늘의 삶은 다시 그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한다. 재택근무, 자율근무제, 기본소득제 등에 관한 논의나 시도가 그 징후요 사회적 자본, 공유 경제 등의 개념이 그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생존의 단계를 넘어 생활의 가치를 추구하는 오늘, 배고픈 것과 먹고 싶은 것의 차이를 면밀히 구분해서 생각해 야 할 때다. 한 가지 예로 지방 대학의 위기와 서울 밀집화 현상을 단순히 일 자리 그 자체로만 볼 게 아니다. 과거 6,70년 대는 생존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상경해야 했지만 지금은 지방이라도 생존은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생활이다. 매슬로우의 5단계 이론에 비춰봐도 우리는 이미 의식주에 관한 본능과 안전 희구라는 생존의 욕구를 넘어 참여와 존경이라는 사회적 단계 곧, 생활에 관한 기대에 들어섰다. 문화와 예술에 관한 억제할 수 없는 미학적 수요가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량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 묶여 있던 자아는 탈대량 사회에 들어서면서 나만의 정체성을 외친다.  존재가 아닌 가치의 구현이 직이나 업의 선택 기준이 되는 시대다. 혹, 결정에 망설이는 취준생이라면 내면에 웅크린 자아실현의 욕구에 주목할 일이요 인재를 구하는 조직이라면 표면적 스펙 너머에 자리한 정체성의 용암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헤드헌터 관리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