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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샘 Nov 01. 2020

생계형 워킹맘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아... 출근하기 정말 싫다.. 며칠만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자고 싶다.'


요즘  힘든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아니 지난여름부터 계속 힘이 들었다.

일적으로 스트레스도 받고 체력도 많이 달리고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상호작용을 많이 하다 보니

목도 매일  아프고.... 지난주는 몸살도 나고.....



난 하루 종일 아이들과 생활하는 유치원 교사이다.

결혼 전 아가씨 때 8년, 결혼 후 아이 낳고 다시 8년째  총 16년 차 이일을 해오고 있다.

16년 동안 이일을 했으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만났을지 상상이 갈까?

한 반에 2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과 하루 종일  마스크 쓰고 쉬는 시간 없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려니

체력에 한계가 오는 듯하다.


퇴근길에  힘든 마음을 삭이기라도 하듯 터벅터벅 걸으며....


일하고 있는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자갸~~ 나, 힘들어도  너무 힘들어!!!  

이제 어린아이들과 생활하는 거 넘 체력적으로 달린다."

"나 이제 일 그만하고  쉬고 싶어!"라고 했다.


남편은 대답한다.

"아구 그렇게 힘들어? 요즘  계속 힘들다고 그러네~~ 어쩌냐?"

 " 일 그만둬!"라고 진심은 아니어도  그 뉘앙스 말이라도  기대했었는데.....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음 그냥  말이라도.. 그만둬, 내가 좀 더 벌면 되지 뭐! 란  얘기를 듣고 싶었나 보다.



그렇다. 나는 생계형 워킹맘이다.

대한민국 워킹맘들 중  몇 명이나 자신의 커리어와 자기만족 때문에 일을 하겠느냐만은?

나처럼 생계형 워킹맘들이 대부분일 것 같지만

그중에서도 나처럼 절박하게 돈을 벌어야 되는 상황은 극히 드물 것 같다.(극히 내 단적인 생각이다)

 당장 매달 월급을 받아 생활비 빼고 개인회생 비, 비싼 이자의 대출금, 시댁 아버님께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충당되어야 한다. 충당되지 않으면 생활유지가 힘들다.

비단 내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다. 꼭 나한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의무와 책임감을 지닌 채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마흔들
그들의 마음속에는 고난의 강을 건너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애환과 아픔, 슬픔과 격동 회환과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내가  생계형 워킹맘이 된 이유는....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남편 사업의 시작


남편은  우리의 전재산 전세자금 5천과 대출받은 얼마의 돈으로  자동차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시댁이 경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도 우리 친정이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없는 살림에 그나마 있는 전세자금으로 사업을 시작했더랬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무모한 도전이 맞는 것 같다!)

그 무모함은 어디서 발동이 걸린 걸까? 젊은 혈기라고 하기엔 좀 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때 정말  의견 차이로 심각하게  갈등이 있었다.

 (이혼이란 말이  오 갈 정도였으니까)

난 사업을 극구 말리는 쪽이었고 남편은 사업을 어떻게든 강행하겠다고 밀어붙이는 상황이었다.

나는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든든한 밑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용이 좋아서 큰돈을 빌린 것도 아니고 든든하게 기댈만한 배경아 언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렇게 극구 말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전세자금 마저  날아가면 정말 우린 길바닥에 내 앉아야 될 상황이기도 했으니까.




며칠 동안 남편은  집을 나갔다. 며칠밖에 있다 돌아오면 생각이 좀 바뀌겠지? 내가 말리니까 조금 생각이 바뀌겠지? 하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며칠 만에 돌아와서는' 더 괜찮은 사업계획서'라며 수첩을 내미는데...

 두 손 두 발이 다 들어졌다. 헛웃음만 나왔다.

'아, 안 되겠구나 사업을 하고픈 마음이 이렇게 강렬하구나, 내가 단념해야겠구나' 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어쩌겠나? 그리 해보시겠다는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업 진행상황을 지켜보았다.

가게를 구하고, 인테리어 하고, 컴퓨터, 카드기, 자동차 관련

물품들 다양한 사업 장비를 갖추고 시작을 했다.


하. 지. 만.

사업은 그리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가게 몫(위치)이 얼마나 중요한지, 홍보가 잘 돼야 되는 것과, 친절한 고객응대, 사후 서비스까지....

나도 일을 도왔지만 사업을 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나야 친절이 몸에 배어있었지만

남편은 좀 할 말만 하고 대답하는 스타일이다.(내가 손님이라도 맘에 안 들었을 것 같다.)

직장에서 느끼는 어려움과 개인 사업을 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신경 쓸 일이 얼마나 많은지 , 개인 시간도  없이 사업에  매달려야만 하는 어려움을 뼈저리게 감내해야만 했다.



남편 사업의 끝?


처음 몇 달은 순항이었었다.  그런데 6개월 정도가 지나면서부터 수입은 급감.... 하기 시작했다.

점점 더 힘들어지더니 1년이  조금 지난 시점부터는 마이너스가 되었다.

먹고살 생활비는 나와야 하는데 생활비마저도 충당이 안되었다.  급기야  대부업체까지 손을 뻗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의 진전은 보이지 않고 더 하락세를 걸었다.


남편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했던지... 조용히 아주 조용히 가게를 정리했다.

이때 내 상황과 기분이 어떨지 상상이 갈까?

그렇게 사업해보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위풍당당했던 남편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미안하다며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너무 미안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있는 이 남자의 모습...


눈물아 니...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며칠 동안..  남편 몰래 눈물을 훔치며 마음을 다독이고 또 다독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전재산 전세자금이었는데 그마저도 홀랑 날려버리고 그야말로 암담했다.


남편은 신용이 낮아 대출이 어려웠고 내 신용으로 대부업체 돈을 빌린 상태라 나는 내 이름으로 '개인회생"을 신청하게  된다.


개인회생 신청하러 법원에 가다


태어나서 처음 법원이란 곳을 갔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과 현실에 마주하고 있었다.

내 생애   법원을  다 와보다니... 그것도  빚 때문에.... 너무 창피해서  숨고만 싶었다.

인생 최대의 위기인 것 같았다.

그런데 법원에 와보니 나보다 훨씬  딱한 사정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나의 상황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하....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개인회생을 어렵게 신청하고 왔다.

법원을 힘없이  걸어 나와 하늘을 보는데 그냥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취업전선에 뛰어들다


개인회생 신청 후 매달 40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매달 상환해야  했다. 그래서 취업을 정말 급하게 알아보았다.

이때 첫째 6살. 둘째 4살 나는 반강제로 생계형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개인회생 비는 갚아야 하니까. 생활비는 벌어야 하니까.  그래야 우리 두 아이들과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작은아이 4살 때,  아직 손이 정말 많이 갈 때 나는  원치 않는 취업을 하게 된다.

이제는 전업맘이 아닌 워킹맘의 신세계로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아이는 아직 어린데.. 돌봐줄 사람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 돈을 벌어야 되고..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마주하고 눈물을 머금고 일을 시작했다.



마주할 수밖에 없던  힘든 선택의 기로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일찍  맡기고 난 유치원에  다른 가정의 아이들을 교육하러 가야 했다.

이런  아이러니한  직업이 또 있을까? 내 아이는 다른 기관에 맡기고 나는 다른가 정의 아이들을 케어하며

교육해야 하는 상황.

이런 상황을 만든 남편이 정말 죽도로 싫었고 이직 업을 선택한  나 자신도 한없이 미웠던 것 같다.


유치원 현장학습 가는 날이었다. 둘째가 새벽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현장학습 가는 날이면  교사는 더 일찍 출근을 해야 한다.(할일이 너무 많으니까.. 전날 다 준비를 해놓는 다해도 현장학습 당일에 처리해야 하는일들이 많다. 어찌해야할까? 아이는 열이나고 출근은 일찍 해야하고...나이가 70세 중반이 되신 친정엄마께 새벽에 전화를 했다.
" 엄마 죄송하지만 아이가 열나서 그러니  하루만 아이 봐주세요..."나이드신 노모는 서울에서 택시타고 힘겹게  인천으로 오셨다.



그렇게  정신없이 아이를 맡기고 출근길 버스에 올라타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열나는 아이를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내 상황 .....아이한테 미안하고 ,연로하신  노모께 맡기고 나와야되는

 이상과 처지 , 내자신이 한없이 처량하고 가엾게 느껴졌다.

내가 이러려고 이남자랑 결혼했나? 시댁 도움 바라는것도 없지만 어쩜 이렇게 하나도 도움이 안될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게  나를 도와주지 않는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건 남편이  나를 많이 도와주려 애를 썼다.

집에서 아이 놀아주는거,아이들 먹이고 씻기는거,병원가는거는 도맡아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한 첫해는 정말 뭐에 쓰인것처럼  정신없이 살았던것같다.

늘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산것 같다.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고, 병원 제때 가지 못해 미안하고, 유치원행사때 늘 아빠보내서 미안하고,

같이 시간 못보내줘서 미안하고.....미안한맘 투성이였다.



일을시작한 첫 3달은 넘 적응하기 힘들어 중간에 그만 두려 부단히 고민했다.

그런데  동네 친한 언니가 " 아이들 생각하면 넘 미안하고 가슴아프지만  버텨!! 이것도 경력이되고 살이되니까!  나중에 잘버텼다고 웃으며 회상할 날이 올꺼야 !

란 진심어린말, 그리고 먹고 살아야 되니까, 벌지 않으면 안되니까 진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래서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일을 시작한지 벌써  8년차이다.  

6살이었던 첫애가 13살이되었고 4살이었던 둘째가 11살이 되었다.



애들아, 힘든시간 잘 이겨줘서  고마워~~


이렇게 내가 고군분투하며 사는 와중에 아이들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아이들 좀더 커서  내가 겪었던, 엄마로서 감당해야 했던 지난날 이야기를 들으며 웃으며 회상할 날이올것이다.

엄마도 힘들게 버텼지만  힘든상황에서 잘 이겨준 잘 자라준 너희들이 더 고맙다고 말할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버텨 보려 한다.


물론 지금도  힘이 든다.. 하지만 지금까지 잘 버텨왔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버텨 보려 한다.

순간 순간이 고비이지만  그동안 버텨 왔던 깡으로 매일을  힘내보려고 한다.


남편 사업으로 인해 빚진 돈과  돈이 없어 맨땅에 헤딩하며 산 집 대출이  큰 짐이 되고 있다.

나 그돈 상환하려면 , 큰짐 얼른 벗어던지려면  일을 해야한다.

난  언제쯤 생계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음속에 꼭 숨겨둔 말 "저 이번학기 까지만 일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이말이 현실이 되는날까지....

생계형 워킹맘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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