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농, 착각의 늪에서

by 익호

독학을 시작하고 나서 어린 시절 접했던 피아노에 대한 기억이 하나 둘 되살아나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은 구체적인 곡에 대한 기억이나 장면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인상에 가까운 것들이다. 건반의 촉감, 학원이 있던 오래된 상가 건물의 냄새, 집 거실에 놓인 낡은 피아노가 풍겼던 분위기 같은 파편화된 이미지들 말이다. 그 시절 배웠던 악보를 꺼내 볼 때도 이 곡을 내가 언제, 어떻게 쳤었지? 하는 의문만 남을 뿐, 손끝에 남아 있는 단서는 거의 없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나는 피아노에 진지하게 임했다기보다는, 그저 세상에 대한 많은 호기심의 한가지 대상, 혹은 재미있는 놀잇거리의 한 가지 정도로 여겼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뒷받침이라 하기엔 뭣하지만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한창 친구 따라 교회를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당시에는 교회란 게 으레 예배시간 외에도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는 시설이었고, 우리 교회 본당 지하 공간도 그러했다. 자연스레 아이들의 아지트가 된 조용한 교회 지하 곳곳에는 피아노가 비치되어 있었고, 곧 우리들의 심심풀이 도구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간혹 학원깨나 다니던 친구들이 앞장서서 솜씨를 뽐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젓가락 행진곡 같은 곡을 두드리며 장난을 치는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어땠을까. 학원 시절 배웠던 곡을 다시 꺼내어 쳐 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피아노에 대한 기억은 당시를 기준으로도 이미 휘발된 지 오래였던 것이리라.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하농의 몇몇 곡들이다. 악보를 보지 않아도 손이 기억할 만큼 단순한 패턴들인데다, 특히 초반의 몇 곡은 사실상 외우다시피 했었으니까. 우리는 하농의 곡들을 가지고 그저 ‘누가 더, 얼마나 빠르게 칠 수 있는가’를 마치 겨루기라도 하듯 놀곤 했고, 이는 곧 주일학교가 파한 뒤의 여흥 같은 것이 되었다.

아이들 특유의 경쟁심과 환호 속에서 개최된 교회의 ‘지하 콩쿠르’. 메인 레퍼토리는 늘 하농 1번이었다. 단순히 오르내리는 패턴이 전부이기에 누구나 쉽게 익숙해졌고, 또 속도를 붙이기에도 간단했으니까. 단조로운 음형을 속주로 몰아붙이며 친구들과 함께 지하실이 떠나가듯 웃었던 날들이 기억에 아직도 선명하다. 누군가가 그 장면을 우스꽝스러운 그림으로 그려 남겨 줬던 기억도 난다.


피아노가 재미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흔치 않은 그 경험 덕분인지, 독학을 시작하고 나서도 체르니나 소나티네같이 아예 새로 배우는 곡들에 비해 하농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 있게 칠 수 있다고 믿어왔다. 메트로놈에 적힌 ♩=108 정도는 이미 콧방귀를 뀌며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속도만 내는 방식이 진정으로 하농을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일까. 다르게 질문해 보자면, 하농을 연습해서 얻어낼 수 있는 궁극적인 능력이 과연 속주력, 즉 민첩성 뿐일까.


‘양손을 동시에’는 하농에서 큰 의미가 없다


어느 날 알고리즘이 이끈 해외 유튜버가 한 손 연습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영상을 인상 깊게 본 일이 있다. 그는 하농 같은 엑서사이즈야말로 양손을 함께 치기보다 반드시 따로따로 연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왼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천천히’ 쳐야 한다고. 그 말은 솔깃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늘 하농을 속도의 게임 정도로 여겨 왔었는데, 그는 완전히 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시험해 보는 건 간단했다. 그동안 자신있다는 이유로 연습 루틴에서 한동안 밀려나 있던 하농을 다시 꺼내 한손씩 쳐 보는 것. 먼저 영상에서 강조한 왼손을 쳐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1번 곡이야 그 시절 교회에서 이미 숱하게 쳐온 터라 그럭저럭 들을만했지만, 곧바로 이어진 2번에서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일 수 있다고? 양손 유니즌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만 들렸었던 연주가 왼손만 따로 친다고 해서 이토록 지저분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일인가. 언짢은 마음을 잠시 누르고 오른손을 시도해 보았을 때 충격 제 2파가 몰려왔다. 왼손에 비하자면 그야 훨씬 나았지만, 역시 빈말로라도 깔끔하다고는 말 못 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늘 양손으로만 쳐왔기 때문일까. 한 손으로 친다는 게 너무나 낯선 감각이기에 이만치나 절뚝거리는 것일까? 그것도 어느 정도는 타당한 설명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주의 깊게 반복해서 귀 기울여 본 결과, 단순히 낯선 감각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설명되지 못할 확연한 둔감함이 왼손과 오른손 모두에서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당장 몇 차례의 연습으로 고쳐질 만한 종류의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진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이제까지 하농을 치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왼손 오른손 어느쪽이든 수월하게 움직인 적이 없었다는 것. 단 한 번도 말이다. 그저 한쪽 손이 다른 한쪽의 모자란 부분을 덮어가며, 빠르게 지나치는 음들이 만들어내는 착각 속에 묻혀 서로를 얼버무리고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속이는 맹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는 것.


아무리 그래도, 진정 눈치채지 못했을까. 내 손과 내 귀와 내 뇌가 직접 듣고 목격하고 참여한 일인데. 이 역시 확인하는 건 간단한 일이다. 녹음해서 들어보면 밝혀질 일.

그렇게 녹음한 하농 2번 곡. (유니즌 연주, ♩=108)

그리고, 실시간으로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미묘한 어긋남이 그곳에는 분명히 있었다.


‘왼손은 거들뿐’


이제는 유명해진 어느 스포츠 만화의 대사다. 인체 협응능력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말일 텐데, 그러나 인간 신체의 각 부위를 조화롭게 협응시키는 우리 뇌와 신경계의 이 탁월한 능력이, 오히려 각 부위의 독립된 성장을 저해하고 있었다면? 양손을 동시에 움직이는 유니즌 연주만 반복해서는 각각의 손이 독립적으로 발전할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양쪽 손이 함께 움직일 때는 무의식적으로 서로 다른 쪽 손에 의지하려 하는 협응 능력이 어김없이 발동되기 때문에.


양손의 협응 능력은 피아노는 물론, 대부분의 악기 연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협응이 없이는 우리는 도저히 어떤 곡도 제대로 연주할 수 없늘 테니까. 그러나 조금 관점을 돌려 생각해 보면, 이 핵심적이고 중요한 능력이 오히려 양 손의 독립적인 발전을 저지하는 한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식으로 말이다(이 경우 손목이라고 해야 하려나).


처음 배우는 소나티네나 체르니의 곡들은 그렇다 쳐도, 나름 자신 있었던 하농조차도 실상은 이토록 엉망이었다니. 악기를 취미로 삼는다는 게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니라는 건 매번 연습할 때마다 싫더라도 목도하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마음이 꺾이는 사건이 있을 땐 그나마 있던 의욕도 죄 날아가 버리고 말 듯하다. 피아노, 나이 먹고 올려다보기엔 너무 험한 산이었나. 하농처럼 간단한 음형에서조차 무너지는 손가락을 갖고 과연 내가 원하는 곡을 원하는 수준만큼 쳐낼 수 있을까? ‘재능은 없을지 몰라도 감각은 있는 편이다’라며 자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은 낯부끄러운 착각에 불과했을까? 자괴감의 그림자는 끊도 없이 드리운다. 아무래도 이번 경험의 충격은 그 여운이 길 듯하다. 어쩌면 한동안 피아노를 떠나 있을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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