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고 기민한 열 손가락, 네이티브 수준의 독보력, 늘 애매하기만 한 감성의 영역에서 확신을 갖는 순간. 어느 날엔가 우주의 기운이 내게로 모여 그 모든 것을 단박에 얻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밤에 꾸는 꿈 말이다). 그러나 아침에 초췌하게 깨어난 나는 그런 비법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한숨과 함께 확인할 뿐이다.
매일 차근히 쌓는 수고만이 모든 학습의 왕도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머리로야 차고 넘치게 안다. 다만 한 발짝 떨어져 스스로를 바라볼 때면, 마음 속 구석에는 미련 같은 것이 가라앉아 있음이 보인다. 아주 하찮은 노력만으로도 금세 일취월장하던 시절이 그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던가. 우주의 편애를 받던 어린 시절이 단 한순간만이라도 잡히길 간절히 바라며, ‘탁월한 연습법’이라는 이름의 출처 모를 조각들을 긁어모으며 나는 오늘도 서성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갈길을 정하지 못한 여행은 방황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홀로 걷는 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서른 넘어 시작한 악기 연주의 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간 연습의 길목에서 성장이란 게 결코 가시적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내가 제대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기는커녕, 때론 이미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은 아닌지 하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이길 저길 서성이기를 멈출 수 없다. 어쩌면 방황이야말로 내가 이 길을 걷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방황. 부정적으로 들리는 단어다. 그러나 방황이란 게 꼭 나쁘기만 한 걸까.
몇 해 전, 지인 부부의 늦둥이가 걸음마를 배워가는 모습을 목도한 적이 있다. 백일도 되기 전에 뒤집기를 시도해 모두를 기쁘게 했던 아이는 그러나 첫 돌을 한참 지나고도 좀처럼 걸음을 떼지 못했었다. 어른들의 초조함은 날로 커져갔지만, 아이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아랑곳 않고 자신만의 방식에만 몰두했다. 힘껏 까치발로 버텨 서 보기도 하고, 소파든 의자든 혹은 내 바짓가랑이든지 간에 뭐든 잡히든대로 붙잡고 한 발씩 옆으로 떼 보기도 하면서.
아이가 시도한 모든 방법이 첫걸음이라는 목표로 향하는 데 정확히 유효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효과적인 방법과 안 하느니만 못한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시행착오를 스스로의 몸으로 겪어가며 ‘어떤 움직임이 유효한가’를 깨달아 갔을 뿐이다. 만약 어른들이 걱정에 겨워 골라주는 쉽고 맛있는, 알맹이만 쏙쏙 빼먹는 방법에만 의지했더라면, 아이의 첫걸음은 훨씬 뒤로 미뤄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 취미 피아노의 여정도 어떤 면에서 아이의 걸음마 방식과 닮은 것 같다. 처음으로 스스로의 연주를 녹음했던 날을 떠올려 본다. 긴장으로 어색해진 손가락보다 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건, 들쭉날쭉하고 지저분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주변에 듣는 이 하나 없는데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참지 못하고 재빠르게 삭제 버튼을 눌러버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연습할 땐 나름 괜찮게 들렸는데, 왜 녹음된 소리는 엉망이었던 걸까.
듣는 귀를 갖추지 못한 초보자의 연주였던 탓일 것이다. 피아노를 칠 때 연주를 듣지 않는다니, 그럼 무엇을 듣고 있었다는 걸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꽤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는데, 현시점에서 낸 결론은 이렇다. 난 여태껏 건반을 눌렀을 때 의도하는 음이 그대로 나온다는 ‘재미’만을 들으며 연주해 온 것 같다. 그리고 수많은 초보 취미생들이 그렇게 연주하는 버릇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듯하다. 애써 부인하지는 말기로 하자.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재미라는 게 없다면 악기 연주를 취미로 삼을 이유부터 애초에 없을 테니까. 다만, 한 단계 높은 곳으로 향하려면 그 ‘재미’에서 언젠가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의식적으로 가져야 한다. 물론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 연주의 맨얼굴을 외면한 채 건반을 친다는 재미에만 머무르는 것, 이것이 아마도 가장 흔한 초보자의 방황이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악보에만 의존해 연습해 온 것 역시 방황의 한 갈래였다. 시야를 악보에 빼앗긴 연주는 앞선 음을 금세 잊게 하고, 다음에 올 음을 향한 준비도 갖추지 못하게 만든다. 암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나 역시 모조리 긍정하는 쪽은 아니지만, 암보로 인해 음악의 큰 흐름을 타기 쉬워진다는 점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외워 침으로써 넓은 시야를 확보한다는 건 언어로 치자면 긴 문장을 거침없이 말하게 되는 것과 같으니까. 어쩌면 이 ‘연주의 유창성’이야말로 연주자의 탁월함을 평가하는 가장 큰 지표이며, 암보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효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빠른 속도로만 하는 연습 역시 초보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천천히 하는 연습의 중요성은 많은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지만, 그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바로 인지적 잡음을 줄이기 위해서다. 급한 마음은 쉬이 실수를 낳게 마련이고, 그 실수는 처음에는 긁힌 상처이겠으나 반복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흉터가 되어 남는다. 우리 뇌와 근육은 생각보다 순진해서, 반복되는 움직임=기억해야 할 정답으로 착각한다는 무서운 사실을 잊어선 른 된다. 그러니 천천히, 더 천천히.
방황. 물론 부정적으로 들리는 단어다. 나도 되도록 앞을 향해서 질러 가고 싶다. 성인이 되어 이제야 시작한 피아노, 헤매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방황은 또한 성장의 단서를 스스로 찾아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좋은 방법을 누군가가 떠먹여 주는 대로 삼키는 것도 효율적일 수는 있겠지만, 잘못된 길을 몸소 체험하는 것, 특히 그 과정을 통해 악기 연주라는 방대하고 모호한 세계를 대하는 ‘두려움’을 다루게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 길이 모호하고 지나치게 더디긴 해도, 음악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니었던가. 하루이틀, 한두 번의 두드림으로 무언가 얻어낼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계.
지인의 아이는 일 년여의 방황 끝에 어느 날 거짓말처럼 첫걸음을 뗐고, 이제는 자유롭게 뛰어다니기까지 하면수 또 다른 여정—첫 한 마디를 내뱉기까지—에 도전 중이다. 어른들의 입모양을 따라 하고, 티비 속 캐릭터들의 소리를 흉내 내며 끊임없이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내는 모습이 기특하다. 나는 아이의 옹알이가 첫 한마디로 바뀌기는 순간을(그리고 얼토당토않지만 그것이 ‘삼촌’ 이기를 내심)기대는 해도, 조바심은 내지 않는다. 충분히 헤맨 끝에는 반드시 도달한다는 것을 이미 한차례 목격했기에.
내게도 그 확신을 빌려오면 어떨까. 우주의 편애를 다시 얻어낸다는 꿈은 여전히 달콤하게 들리지만, 이제는 그보다 매일의 연습 속에서 마음껏 방황하는 길을 긍정해야 하지 싶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것만이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고.
이제 하루의 연습이 끝나고 피아노의 뚜껑을 덮을 때면 가만히 음악을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가져 본다. 오늘 얼마나 많이 쳤는가보다, 얼마나 귀 기울이며 헤맸는가를 되짚어 보는 의식. 그 짧은 되새김의 순간이 앞으로의 수많은 방황 속에서도 나를 성장으로 이끌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