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가는 악보가 연습하는 소화량을 한참 앞지르고 있다는 걸 눈치챈지는 사실 꽤 되었다. 바이엘 시절에는 다음 교재 후보를 물망에 올리기도 전에 100곡을 다 떼 버릴 기세였었는데, 지금은 한 곡 아니 단 몇 마디에서 몇 주씩 머무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실력은 제자리인데도 듣는 귀만 점점 높아진다는 점일텐데, ‘언젠가 치겠거니’ 하는 곡이 하나 둘 생길때마다 덮어놓고 악보부터 사들이는 버릇이 들어 버린 것이다. 취미인들의 숙명인 장비병 비슷한 거라 해야 하나. 새것 그대로 책장에 꽂힌 채 꺼내어질 기약 없이 뻗어만 가는, 악보의 책등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보라. 늘어난 자산을 대하듯 뿌듯하기도 하지만, 곧 내안의 허영심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시선을 돌리고 만다.
악기 연주. 그 실체 없는 과정에서 성과를 얻는다는 것이 몇 푼의 돈으로 맞바꿀 수 있는 만족감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까마득한 일이며, 솔직히 말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게 사실 쌓이기만 하는 악보들과 같은 실체적인 허영에 가까운 것은 아닌가 하는, 연습이며 분석이며 애써 봤자 내 안에 이게 과연 얼마나 남을까 하는. 그런 허무한 감각이 피아노를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항상 따라붙어 가끔씩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럴수록 어째 좋은 에디션의 치지도 않을 악보를 더 사모으게 되는 것 같다.
허영심 가득한 마음을 얼버무리며 이제껏 ‘수집한’ 악보들을 모조리 꺼내어 거풍이라도 시키듯 훑다 보니, 바이엘의 첫 곡도, 체르니의 첫 곡도, 소나티네도 모짜르트도 인벤션도 첫 곡은 모두 C장조로 쓰였다는 것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최근 구입한 초견 교재 역시 마찬가지다. 1번은 언제나 C장조로 시작한다. 그래서, 그게 뭐? 초보자를 배려해 조표가 없는 조를 썼겠거니, 하고 이제껏 싱겁게 생각해 왔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진정 이유가 그것뿐일까. 왜 작곡가들은 특정한 조성을 정해 놓고 음악을 만들어 내는 걸까. 악기의 음역적 한계 때문에? 피아노라는 넓은 음역대의 악기에서도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C장조는 순수함이나 천진난만함의 조, f단조는 단순한 슬픔을 넘어선 비장함마저 내포하는 조… 음악에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각 조성에는 고유의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아이디어. 내 짧은 경험에 비추에 보아도 황당하게만은 들리지 않는다. 확실히 C장조에능 단순하고 편안한 느낌이 있다. 단순히 조표가 붙지 않아 읽기 쉽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겐 큰 도전이었던 인벤션 1번 곡을 익혀가며 수없이 고군분투 했었지만, 난 그 과정에서 고통보다는 오히려 편안함 비슷한 무언가를 더 느꼈던 것이다.
조성에는 캐릭터가 있다… 그러나 악보를 펼쳐 보았을 때, 그 감정적 색채를 구분 지어 파악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천진난만함이나 편안함 같은 인간 고유의 감정이 오선지 위 과연 어디에 존재한다는 걸까.
조성이 성격을 가지느냐 아니냐 하는 이야기는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나 등장할 법한 도시전설처럼 들리지만, 그 갑론을박의 역사는 생각보다 긴 듯하다. 가곡 송어로 유명한 17세기의 시인 크리스티안 슈바르트는 그의 저서에서 각 조성에 고유한 성격이 있다고 서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조율체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음색의 차이가 조성에 성격을 부여한다는 인식과, 인간 감정의 객관성을 모방하는 도구로서의 음악이 지배적이었던 서양 음악의 시대적 배경이 어우러져 음악가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수백 년간 발전, 논의되어 온 것을 명문화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현대의 음향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을 때 이러한 아이디어에 신빙성을 부여하기란 어렵다. 평균율에서든 순정율에서든 각 조성의 차이란 그저 12음의 시작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물론 조성에 따라 주로 쓰이게 되는 음역대, 특히 최고음과 최저음 등에는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고, 이는 듣는 이에 따라 심상의 차이를 갖게 할 수는 있겠다. 다만, 그렇다 해도 심상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이므로 이에 객관성을 호소하긴 어렵고, 정형화할 수도 없다. 하물며 수세기 전까지 악기들의 음정이 현대보다 반음*이나 낮게 조율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조성-성격론이 어불성설이라는 데에 확신의 무게가 실리는 듯하다.
*온음까지 차이 나는 경우도. 오늘날 C장조로 연주되는 곡이 과거에는 B장조(반음) 혹은 b플랫 장조(온음)까지 내려간 울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음악은 수세기동안 이어져 온 전통의 세계다. 그 전통을 존중하여, 마음을 열어 약간의 상상력을 뻗어 보자. 옛날 한 무리의 음악가들이 C장조에 ‘천진난만한’ 캐릭터가 있다는 믿음을 품었고, 그 사유를 따라 곡을 써 내려갔다면, 그들의 작업물이 후대에 남을 만한 명작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사유만큼은 이어져 비슷한 파생을 끊임없이 만들어 냈을 것이다. 대를 이은 유산은 초기에는 그저 무의식적 관행에 가까웠겠지만, 세대를 거듭해 누적되면서 점차 영혼을 갖추게 된다. 그 집단 인식의 계보에는 현재 누구나 알만한 거장들이 끼어있었을지도 모른다.
클래식 음악의 라이브러리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목록이 더해지는 일 없이 완결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에, 이 닫힌 계에 한정해서 ‘C장조 악곡=천진난만함’이라는 공식은 마침내 해석의 당위성을 갖추게 된다. 조성에 성격이란 게 실제로 있든 없든, 이미 수많은 작곡가들이 그러하다 믿고 작품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정량적 수치를 헤아리는 영역이 아닌 문화적 현상에 가깝기에,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인식의 산물이 곧 그 해석의 기틀이 되는 것에 타당성이 부족하지도 않다.
내가 인벤션 1번 곡에서 편안함을 느낀 것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이미 그 역사 속으로 발을 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긴 세월 동안 창조적 상상력을 가진 이들이 C장조에 ‘시작’이나 ‘순수함’ 같은 의미를 새겨 왔고, 나는 그 곡들을 숱하게 들어왔으며, 이제는 스스로 연주하려 하기까지 한다. C장조 악보의 어디를 살펴봐도 ‘순수하게’라는 지시어를 찾을 수 없지만, 오선지 위에는 긴 역사 동안 상상력의 계보 위에서 수없이 덧칠된 유산이 영혼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조성에 고유한 성격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과 반복된 행위 속에서 그 의미는 실재가 되었다. 눈앞에 없는 것을 상상하고 믿는 힘, 그것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본질 이기 때문에. 따라서 조성에 캐릭터가 존재하느냐를 따져 묻는 일은 애초에 무의미한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연습해 온 악보, 그리고 책장의 능선 속에 잠들어있는 많은 악보들 중 상당수가 그 첫 곡을 C장조로 두는 이유는 초보자를 위한 친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첫 곡들은 시작의 순수함을 함축하고 있고, 세기를 넘어 이어져 온 믿음이 형식이 되어 자리 잡은 증거로서 기능한다.
그 믿음이 환상에 불과할지는 몰라도, 실제로 나는 여전히 C장조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순수함을 느낀다. 임시표가 붙지 않은 흰 건반들을 누르면서 오래전 누군가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길을 되짚는 의식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실체 없는 믿음이 음악의 본질을 품고 있다는 점을 긍정할 수 있다면, 책장에 쌓여 가는 허영의 능선을 바라볼 때마다 부끄러움을 조금은 거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아가 내가 피아노에서 얻고자 함이 모호하고 뜬구름 잡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