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없지만 끝낼 수는 있는

by 익호

요리는 불조절이 생명. 누가 제일 먼저 꺼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일 밥해먹는 사람으로서 자주 곱씹게 되는 말이다. 얕은 자취 경력에 비하자면야 음식 솜씨에 나름 자신이 붙어 있다 자부하지만, 열과 시간을 다루는 섬세한 감각은 좀처럼 손에 넣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재료가 설익거나 혹은 너무 퍼져버리는 양 극단의 실패는 여간해선 겪지 않게 되었지만, 정확한 열량을 알맞은 시간 동안 분배해 수준 높은 요리를 완성해 내는 일은 내겐 아직 운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불 조절의 어려움은 피아노에서 낯선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인벤션에서 두 번째로 택한 8번 곡. 이 곡을 익히려 한지는 꽤 되었건만, 완성의 타이밍을 가늠하지 못하고 자꾸만 불만 껐다 켰다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한 주 반은 악보를 읽는 데 썼다. 그다음은 손가락 번호를 머리에 새기고, 이어서 왼손과 오른손을 맞추는 데에 꼬박 한 달 넘게 보낸 것 같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곧 언제 이 곡이 완성될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무엇을 위해 계속 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얼마나 연습해야 하나의 곡을 완성했다 말할 수 있는 걸까? 그 완성의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걸까. 약한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기만 하면 알아서 국이 완성되겠거니 하던 것처럼, 난 매일 오후 피아노 앞에 앉아 곡이 저절로 완성될 순간을 고대하고 있는 듯도 하다.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성을 향한 몸짓인지, 아니면 이미 끝난 요리를 망치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지도 못하면서.


또 하나의 격언: 막힐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라.

다시 꺼내 보기가 영 민망하여 죄다 삭제한 줄로만 알았던 연습 영상이 몇 개는 살아남아 있었다. 하나씩 들어보았다. 예상대로 박자는 삐걱대고, 음정은 거칠고, 손끝은 음을 쫓아가기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 계속 듣자니 한편으론 그 조잡함이 생기 있게 들리기도 했다. (자기 연민의 감상에 젖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툴고 불안하지만 생생한 소리. 새 곡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의 기운찬 추진력이라고 해야 할까. 무엇이 됐든 최근의 내 연주에서 이런 온기는 찾아볼 수 없다.


여담이지만 취미생에게 현타는 늘 자기 검열의 순간에 온다. 이만큼 했어도 겨우 여기까지라니. 내가 이걸 계속 붙잡고 있을 의미가 있나, 하는…


요리는 불 조절이 생명. 설익어도 안 되고, 태워서도 안 된다. 그 절묘한 구간을 간파해 내는 일은 전문 요리인이 아닌 내게는 어려운 작업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풋내기의 연주는 도저히 들어줄 만한 것은 못 되더라도, 그 속에는 생생한 기운이 남아 있다. 반면에 현재 내 음악은 음표의 나열만큼은 틀림없이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지만, 어딘지 풀이 죽고 맛없게 들린다. 퍼질 대로 퍼진 국수가락마냥. 날것과 오버쿠킹. 그 사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음악적 완성의 순간을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완성이 있다고 치면, 그 단서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악보대로 정확하게 음을 누를 수 있게 되는 순간이 그러할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한 달도 전에 인벤션 8번을 완성한 셈이 된다. 다이내믹을 정확하게 지켜냈을 때일까? 아쉽지만 이 시대의 곡이 으레 그렇듯, 인벤션에는 셈여림 지시가 붙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역시 감정을 담아 칠 수 있게 될 때일까. 아, 그것만큼은 아직 내 언어로는 풀어내기 불가능한 세계지. 그리고 예상컨대 앞으로도 알아차리기 어려울 영역이고.


J군은 자못 진지하게 푸념을 늘어놓는 나를 웃으며 ‘전공생들조차 곡의 완성에 대해 확신을 갖는 법은 드물다’고 말한다. 그런가. 정녕 그런 것이란 말인가.


이름 높은 화가조차 때로는 언제 붓을 내려놓을지 몰라 망설인다 한다. 명필가의 퇴고는 예기치 못한 순간 윤색이 되어버린다. 음악에서도 완성이란 집착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을까. 생기를 없애고, 때로는 태워 망쳐버리기도 하는 어긋난 불조절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인벤션 8번이라는 요리를 이미 망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주방에서 타이머를 쓴다는 것이 요리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왠지 싫었었다. 차를 우릴 때도 시간과 온도를 재려 하지 않고 감각에만 의존하려 했다. 감각으로 해야 진짜 같고, 세련된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감각이란 변덕스러운 것이다. 피곤한 날엔 과추출된 차 맛을 모르게 만들고, 마음이 들뜬 날에는 냄비를 태워먹게도 하지 않았던가. 음악은 요리나 차보다도 더욱 감각에 호소해야 하는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실체적 장치가 꼭 필요할지 모른다. 많은 연주자들이 연주회나 독주회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정기적으로 가지려 노력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도 완성이라는 잡을 수 없는 환상에 심리적 마감선을 긋는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J는 여전히 개운치 못해 하는 나를 보고 ‘한 곡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지 말고 계속해서 새 곡으로 나아가라’는 언젠가 했었던 조언을 또다시 던졌다. 나는 그의 말을 완성이라는 환상에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일부 받아들이기로 했다.

음악은 끝없는 세계다. 그러나 그 끝없음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한 발자국이 지면에 닿는 순간을 스스로 정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곧 넘어지게 될 테니까.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일 년이 되었든 곡에 마감일을 정하고, 그 날짜를 향해 연습해 나가는 방식을 시험해 볼까 한다. 디데이는 곧 나만의 정기 발표회날이 될 것이다. 관객은 스마트폰 카메라 한 대뿐이겠지만, 지금의 내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지속 가능한 계획은 소박해야 하는 법. 굳이 거창할 필요도 없다.


양손에서 비슷한 음형을 끊임없이 주고받는 듯싶다가도 결국 제 자리로 돌아와 음악을 맺는 인벤션 8번 곡. 이 곡뿐만 아니라 인벤션의 모든 곡의 마지막 음표에는 페르마타가 달려 있다. 페르마타는 때론 끝을 뜻하기도 하지만, 본디 잠깐의 멈춤을 뜻하는 기호다. ‘음악은 끝없는 세계 속에서 무궁히 이어지겠지만, 어쨌든 당신은 여기에서 끝내야 한다’라는 것을 바흐 자신이 이미 자필을 통해 내게 상기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끝은 없지만 끝낼 수는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함을.

바흐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완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나보다, 하는 약간 쑥스러운 감상에 젖은 채로, 나는 다음 번에 도전할 인벤션 곡을 고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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