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교토 맑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호 Mar 31. 2016

저녁볕의 선물


교토는 서울보다 거의 한 시간 정도 일찍 해가 뜨고 진다. 두 곳 다 같은 시간대를 쓰고 있지만 이곳이 훨씬 동쪽에 위치한 탓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샤워도 하고 주방 정리도 돕고... 그렇게 시간을 좀 때우다 차 한 잔을 끓여 스텝들과 몇 마디 나누고 있자면 어느새 방으로 올라갈 시간이 다가온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이층 미닫이 문을 열면 서쪽으로 난 창밖이 눈부시게 붉다. 대나무 발을 뚫고 방바닥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강렬한 저녁 햇살. 여름의 태양은 낮이 긴 만큼이나 여러 얼굴을 가졌지만, 그중에서도 이 시간대의 태양은 특별한 표정을 드러낸다. 털썩 자리에 누운 졸린 눈을 통해 들어오는 그 불가사의한 빛. 그것은 곧장 눈을 통과해 머릿속으로 들어가 이윽고 온몸으로 스며들고, 강도 높은 노동으로 녹녹하게 풀어진 육체에 이상한 자극을 퍼뜨린다. 말초가 저려오는 그 느낌은 내 안의 어딘가에 잠들어 있었을 먼 옛날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의식 위로 떠오르게 한다. 

 

지루하게 길고 길기만 했던...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어린 시절. 과거 미래 현재 같은 그런 객관적 시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그 시절에는 받아들이는 모든 것들을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머무르게 했었다. 그리고 매사에 솔직하게 반응했었다. 내게로 오는 모든 것들에게 어떠한 편견이나 오해도 가감하지 않고 행동했었다. 그 당당함은 당당했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누구도 상처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나로 인하여 상처받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만약 내가 지금 그 당시처럼 행동한다면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들을 상처주겠지. 실제로 그런 태도를 갖춘 것과 그런 척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에. 



저녁볕은 그 옛날의 맑고 당당했던 어린아이를 떠오르게 한다. 창가의 대나무 발을 통해서 보일 듯 말 듯 떨어져 가는 태양의 얼굴. 함께 떨어져 가는 기억들. 아주 찰나에 불과하지만 아름다운 추억의 표정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정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야."


어머니가 언젠가 들려줬던 이야기. 춤을 배워보는 게 어떠냐며 하셨던 이야기지만. 어쨌든 이러한 노동을 통해서도 충분히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체력의 소진은 정신의 찌꺼기를 함께 태워버린다는 것. 

아마 그로 인해 오늘 내 영혼은 조금 맑갛게 보이리라. 거기에 서쪽 하늘빛이 주는 신비한 힘이 더해져 옛 기억이 반짝반짝 떠오르는 것이리라. 그것들은 의심과 거짓 웃음으로 하루를 보내는 서글픈 어른에게 따듯한 위로를 보내고 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오늘 밤은 꿈 없는 편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방 츠키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