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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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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Apr 01. 2016

여름 감기

그리고 예정에 없던 만찬


여관의 일이란 투숙객들이 외출 중인 시간대에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들이 대부분. 덕분에 이곳의 매일 매일은 서두름의 연속이다. 더군다나 중년 이상의 방문객이 주류인 우리 여관은 분지의 한낮 더위를 못 이기고 금방 숙소로 돌아오는 분들도 종종 있다. 그들과 맞닥뜨리는 일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고 또 여주인도 스텝들에게 닌자처럼 행동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일을 마치려면 보통 두세 시 정도를 기준으로 대강 마무리 지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낮동안 정신없이 일한 탓에 많이 흘린 땀을 공동 샤워실에서 씻어내면 저녁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보통은 남은 날빛을 이용해 산책을 나가거나 장을 보러 가거나 하지만... 이 날은 어쩐지 컨디션이 영 안 좋았다.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얼굴빛이 안 좋은데."


한숨을 푹푹 쉬는 나를 보고 여주인은 걱정스레 묻는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야. 한창 바쁜 시기에 일할 사람이 드러누우면 곤란하니까."


"면목없지만 그 큰일이 이미 일어난 것 같아요. 감기 기운이 좀 있네요." 


말이라는 것은 신기하다. 내용보다는 어투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곤 한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저런 말을 들었다면 꽤나 속이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주인의 한마디는 어딘지 마음을 쓸어내리는 느낌이 있다. 마치 어머니의 핀잔 같은 그런.


"그럼 오늘은 어디 싸돌아다닐 생각 하지 말고 위에서 쉬고 있어요. 이따 체력을 좀 보충하러 나갑시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나타나는 미야가와 거리. 그야말로 기온다운 기온 한 복판인 곳. 이곳의 밤 풍경은 교토의 고즈넉한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장소다. 근처에는 마이코들의 연습장도 있기에 오며 가며 그들을 볼 기회가 많은 곳이기도 하고. 그 돌다다미 거리를 북쪽으로 걷다 보면 아담한 가게가 하나 나타난다. 결고 비싸지 않은 가격에 맛있는 단품 요리들을 맛볼 수 있는 곳. 코오링光琳 .


"나도 오늘은 영 상태가 좋질 않네요. 최근에 쉴 날이 전혀 없었으니까.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고. 오늘은 밖에서 먹도록 합시다. 그러고 보니 익호군 환영회도 아직 하질 못했었네."


교토하면 떠오르는 유바사시미
하모(갯장어)도 교토의 명물 중 하나


그렇게 따라나선 것이 어쩐지 만찬회가 되었다. 교토에 와서 일본요리다운 요리는 아직 먹지 못 했었는데, 감기 기운이 있었던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름다운 접시들에 그만 넋을 놓았다.

 

유바 튀김을 올린 샐러드
사쿠라와 말차 소금을 찍어먹는 템푸라


평소에는 일 엔짜리 한 장 허투루 쓰지 않지만 또 이렇게 외식이라도 하는 날에는 과감하게 이것저것 많이 시키는 성격인 그녀. 


쫄깃한 식감의 에비이모(고구마의 일종) 앙카케. 개인적인 베스트.



코오링은 아마 내 또래일 젊은 남자가 혼자 모든 요리를 하는 가게였다. 그의 부인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남편의 명령에 따라 분주하게 보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남자의 어머니일 노부인도 옆에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 요리인들의 프라이드란 주변 친구들을 통해서도 또 아르바이트 경험을 통해서도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이곳에서는 그가 제일의 권력자다. 부인과 어머니조차도 그에게는 조수일 뿐이다. 시종일관 명령조로 일을 지시하고 그녀들은 눈빛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움직인다. 진지한 자세로 생업에 임하는 가족의 모습이 안 그래도 특별했던 음식들을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들어 주는 듯했다.


"요리가 입에 맞아요? 여기는 우리 손님들한테도 자주 소개하는 곳이에요. 영어 응대는 불가능하지만 음식 맛으로는 항상 다들 만족하니까. 자, 그럼 마지막 코스를 시켜볼까. 이걸 꼭 먹어야만 여기서 식사를 마쳤다는 기분이 든다니까."


달걀 죽雑炊


"타마고 조스이예요. 후후 불지 말고 뜨끈하게 먹어봐요. 여름 감기쯤 다 달아날 거예요. 생각보다 몸이 약한가 봐? 한국 남자들은 병역에 다녀와서 튼튼할 줄 알았더니만."


병역과 감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답니다. 


하지만 따듯한 계란죽의 효험은 사실이었다. 항상 몸살부터 와서 날 괴롭히는 감기도 이날 밤 자고 일어나자 말끔히 나았으니까. 


혼자 들어오기엔 조금 본격적인 요릿집이었기 때문일까 이 날 이후로 코오링에 간 일은 없다. 나중에 홀로 술 한 잔 할 호기가 갖춰질 때가 온다면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 코오링. 일 년 남짓의 교토 생활중에서도 기억에 진하게 남는 장소 중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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