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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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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Apr 04. 2016

다섯 산의 불

고잔 오쿠리비


교토의 여름은 매일 매일 행사의 연속이다. 낮 밤 할 것 없이 이어지는 기온마츠리의 부속 행사들과 칠석과 관련된 이벤트들, 비와호의 불꽃놀이, 밤하늘을 빛으로 수놓는 사찰과 신사들의 라이트 업 행사. 그 외에도 내가 다 체크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잘한 행사들이 시내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유난히 길고 더운 분지의 여름은 팔월이 다 지나가도록 활발하게 타오르고 있는 모양새다. 


그 많은 행사들 중에서도 여름의 끝자락을 대표하는 것이 있다면 '고잔오쿠리비五山送り火'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교토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산. 그 중턱들에 불꽃으로 큰 글자를 새기는 신비한 행사. 

그 고잔오쿠리비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불명인 듯하다. 다만 봉盆의 다음날 영령들을 명계로 돌려보낸다는 불교적 의미의 행사로부터 시작되어 아주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온다는 점만이 알려져 있다. 


여느 때처럼 오늘도 여주인은 손님들과 함께 나갈 채비를 하신다. 물론 나도 동행하기로 했다. 일생에 단 한 번 경험할지도 모르는 특별한 풍경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카모가와를 따라 걷다가 히가시야마 쪽의 大문자를 보는 것이 목표예요. 다른 산의 글자들은 잘 보이지도 않을 거니까. 시청 부근까지는 걸어가야 할 것 같으니 편한 신발 신고 나오도록 하세요."




"어쩌면 택시를 타야 할지도 모르겠어. 사람들이 예상보다 더 많이 몰린 것 같은데... 산조三条쪽 다리에는 벌써 사람들로 꽉 찬 모양이라고 하니까."


투숙객들 중에서는 중국인 여성과 유럽인 남성이 한 명씩 우리를 따라나섰다. 여주인이 부른 야사카택시를 타고 산조 다리 근처에 내리자 교각 위에 사람들이 빼곡히 보인다. 카모가와 강변을 따라 걷는 관광객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가는 동안 해는 이미 저물었고, 맥주를 한 캔씩 손에 들고 떠들썩하던 젊은이들도 손을 꼭 붙잡고 유카타 차림으로 천천히 거닐던 노부부들도 어느새 모두들 동쪽 산자락만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봐."



멀리 외롭게 문자 하나가 떠올랐다. 

온통 어둠인 가운데 붉게 타오르는 문자. 

이상한 기분이다.

바람 부는 팔월의 교토. 멀리 밝혀진 글자를 바라보며 밤하늘 아래에 서 있는 나. 존재 자체가 몽롱해지는 그런 기분.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미지가 나를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내가 새삼스럽게 낯설다. 이런저런 설명을 붙여봤자 근본에는 다가설 수 없이 자꾸 겉돌고 마는 느낌이지만, 그것은 내가 겪었을 리가 없는 무언가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이며, 살아보지 않았던 유구의 세월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고잔오쿠리비가 종교적인 행사로서 이 시대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면, 그 처음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되었든 간에 지금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다. 영혼이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저 불꽃을 바라본 사람들의 마음은 틀림없이 그 전과는 조금 다를 것이기에. 






"끝났네요. 자, 그럼 뭐라도 먹으러 갈까요? 배가 고프면 전쟁을 할 수 없는 법!"


하염없는 감상을 깨뜨린 것은 밝고 큰 여주인의 목소리.


'그건 지금 상황에 적절한 속담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배가 고프긴 하네요.'


동행한 중국인 여성 관광객은 어쩐지 대부분의 육류를 입에 대지 못하는 분이신 것 같았다. 여주인과 영어로 몇 마디 실랑이를 벌이더니 금세 토라진 얼굴이다.


"어쩔 수 없군요. 지금은 일단 접객을 하는 상황이라고 봐야 할 테니 그녀에게 배려하는 게 맞겠죠." 


시청을 지나쳐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늘어서있는 여러 음식점들을 들락거리며 메뉴를 확인하고 나오는 작업의 반복이 시작되었다. 얼마 안 가서 우리들은 조금 지치기 시작했다.


"우동이라면, 먹을 수 있겠지?"


여주인도 약간 짜증이 난 듯, 근처의 마루카메를 가리켰다.


토로타마 냉우동. 지금도 더운 여름 밤이면 종종 생각나는 메뉴


다행히 중국인 여성도 밀가루에는 반응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늦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여주인과 손님들만 택시를 태워 보내고 난 걷기로 했다. 편의점에 들러 살 것도 있었고 어쩐지 혼자 산책하고픈 기분이기도 했고. 어쩐지 요사이 부쩍 생각이 늘어난 느낌인데. 이대로 교토에서 남아있는 기간을 보내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좀 더 새로운 환경으로 나를 던져 넣어야 하는 게 맞는지. 터덜터덜 홀로 걷는 카모가와 강변은 어느 새 인적도 거의 끊겨 있었다.


부엌문을 열고 오피스로 들어서자 여주인이 반기며 말을 걸었다.


"이제 와요? 아까 그 중국인, 내심 미안했었나 봐... 자기 때문에 폐를 끼쳤다면서 이걸."


술병을 하나 내밀며 특유의 웃음소리를 낸다. 


"자기가 한 병 마셔보고 맛있었대. 음식은 가리면서 술은 또 잘 마시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우리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습지 않아?"


악의는 눈곱만큼도 들어있지 않은 그 웃음에, 나도 따라서 미소가 번졌다. 



이 집에서 술을 한 방울이라도 입에 대는 것은 나 혼자였으므로, 오늘 밤 이 한 병은 전부 내 차지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취기에 기대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여주인과 상의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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