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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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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r 05. 2016

청수사 언덕

키요미즈데라 산책

히가시야마 서른여섯 봉우리와 카모가와 물줄기 사이에는 유서 깊은 마치야들이 제각각 내 나이 서너  배쯤 되는 역사를 간직하고 서 있다. 

내가 머물게 될 이 목조 건물 역시 그들 중 하나.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상과, 때로는 사건들이 이곳을 스쳐갔을까.

장지문을 지날 때면 머리를 부딪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할 만큼 낮은 천장이

이 곳이 지어졌을 때 살던 사람들과 나의 세대가 이미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 준다.


수년전까지는 소아과로 쓰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보다 더 전에는 오도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교습소 겸 차방으로 쓰였다고 한다.

훨씬 더 전에는 기온 마이코들의 기숙사 같은 역할이었고, 그것이 이 건물이 지어진 본래의 목적이었단다.


그것이 최근 몇 년 동안은 교토의 많은 마치야들처럼 빈 집 처지였었는데 

우연히 이 여주인의 눈에 띄어 숙박업체로 개조된 것이 이년 전쯤의 일.


비어 있는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아마 도쿄의 어느 부호 손에 넘어가 헐리고선 흉측한 싸구려 호텔쯤이 되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주변의 많은 마치야가 그런 식으로 사라졌듯이.


리셉션으로 쓰이고 있는 마루


료칸이라고 하기에는 분명히 부족하지만 게스트하우스라고 불리기엔 조금 섭섭한 수준의 시설. 게다가 기온 한 가운데에 있다는 위치적 이점을 지녔기에 비수기에도 손님이 끊이질 않는 이 곳을,  여주인은 혼자서 운영하고 있다.



"교토는 처음이랬나요? 오늘은 가까운 데로 산책이라도 나가 보지 그래요?"



바쁜 여관 일에 난 필시 방해꾼이었으리라. 

불과 십여 분 거리에 청수사가 있다는 여주인의 권유에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서 본다. 


청수사. 키요미즈데라 가는 언덕은 굉장한 인파였다. 

일본인들도 교토하면 무의식 중에 떠올리는 과자 '야츠하시'를 쟁반에 들고 나와선 시식을 권유하는 상인들.

양 손에 쇼핑백을 들고 또 가방을 메고 사진기까지 들고서도 발겨움이 가벼운 관광객들.

한낮을 막  지난 여름햇살이 무색할 만큼 언덕길은 스스로 뜨겁다. 


청수사 가는 길


맑은 물의 절이라는 이름답게 이곳의 관광 테마는 물. 

하지만 오백 엔이나 하는 맹물을 호기롭게 마실 만한 풍류가 내게는 아직 없는 모양이다. 


삼중탑
子安塔 코야스 탑


옛 것을 제대로 지켜내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되도록 오랫동안 원래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대의 기술을 집약시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모습으로 버전 업 시키는 것일까? 

보전일까 보완일까의 문제가 되려나. 

어쨌건 내가 답을 낼 수 있는 종류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본당이 보이는 길목


사람들이 흩어진 한산한 길목을 걷고 있자

문득 자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소속되어있던 곳에서 온전히 벗어났을 때의 쾌감 같은, 그런 종류의 자유.

그리고 앞으로의 일 년은 아마 이런 자유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겠지. 

계획은 없다.

돈을 벌 생각도 일단은 없다.

교토를 올 생각도, 처음엔 없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어쩌다 보니 청수사를 걷고 있는 나.


'난 무엇을 찾으러 이곳에 왔지?'


자연히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법도 하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거나, 너무나도 추상적이지만 성공하고 싶다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갖게 되는 생각. 

그 생각을 현실화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줌도 채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인정하는 것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몫.

그 인정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꽤 방황할 수밖에 없을 텐데...


난 방황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온 것일까?

그런 이유로 온 것일까.


어찌 되었든 지금은 그저 이런 식으로 산책을 계속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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