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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청수사 언덕

키요미즈데라 산책

by 익호

히가시야마 서른여섯 봉우리와 카모가와 물줄기 사이에는 유서 깊은 마치야들이 제각각 내 나이 서너 배쯤 되는 역사를 간직하고 서 있다.

내가 머물게 될 이 목조 건물 역시 그들 중 하나.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상과, 때로는 사건들이 이곳을 스쳐갔을까.

장지문을 지날 때면 머리를 부딪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할 만큼 낮은 천장이

이 곳이 지어졌을 때 살던 사람들과 나의 세대가 이미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 준다.


수년전까지는 소아과로 쓰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보다 더 전에는 오도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교습소 겸 차방으로 쓰였다고 한다.

훨씬 더 전에는 기온 마이코들의 기숙사 같은 역할이었고, 그것이 이 건물이 지어진 본래의 목적이었단다.


그것이 최근 몇 년 동안은 교토의 많은 마치야들처럼 빈 집 처지였었는데

우연히 이 여주인의 눈에 띄어 숙박업체로 개조된 것이 이년 전쯤의 일.


비어 있는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아마 도쿄의 어느 부호 손에 넘어가 헐리고선 흉측한 싸구려 호텔쯤이 되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주변의 많은 마치야가 그런 식으로 사라졌듯이.


2013년~2014년 042.JPG 리셉션으로 쓰이고 있는 마루


료칸이라고 하기에는 분명히 부족하지만 게스트하우스라고 불리기엔 조금 섭섭한 수준의 시설. 게다가 기온 한 가운데에 있다는 위치적 이점을 지녔기에 비수기에도 손님이 끊이질 않는 이 곳을, 여주인은 혼자서 운영하고 있다.



"교토는 처음이랬나요? 오늘은 가까운 데로 산책이라도 나가 보지 그래요?"



바쁜 여관 일에 난 필시 방해꾼이었으리라.

불과 십여 분 거리에 청수사가 있다는 여주인의 권유에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서 본다.


청수사. 키요미즈데라 가는 언덕은 굉장한 인파였다.

일본인들도 교토하면 무의식 중에 떠올리는 과자 '야츠하시'를 쟁반에 들고 나와선 시식을 권유하는 상인들.

양 손에 쇼핑백을 들고 또 가방을 메고 사진기까지 들고서도 발겨움이 가벼운 관광객들.

한낮을 막 지난 여름햇살이 무색할 만큼 언덕길은 스스로 뜨겁다.


2013년~2014년 051.JPG 청수사 가는 길
2013년~2014년 070.JPG


맑은 물의 절이라는 이름답게 이곳의 관광 테마는 물.

하지만 오백 엔이나 하는 맹물을 호기롭게 마실 만한 풍류가 내게는 아직 없는 모양이다.


2013년~2014년 054.JPG 삼중탑
2013년~2014년 067.JPG 子安塔 코야스 탑


옛 것을 제대로 지켜내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되도록 오랫동안 원래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대의 기술을 집약시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모습으로 버전 업 시키는 것일까?

보전일까 보완일까의 문제가 되려나.

어쨌건 내가 답을 낼 수 있는 종류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본당이 보이는 길목


사람들이 흩어진 한산한 길목을 걷고 있자

문득 자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소속되어있던 곳에서 온전히 벗어났을 때의 쾌감 같은, 그런 종류의 자유.

그리고 앞으로의 일 년은 아마 이런 자유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겠지.

계획은 없다.

돈을 벌 생각도 일단은 없다.

교토를 올 생각도, 처음엔 없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어쩌다 보니 청수사를 걷고 있는 나.


'난 무엇을 찾으러 이곳에 왔지?'


자연히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법도 하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거나, 너무나도 추상적이지만 성공하고 싶다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갖게 되는 생각.

그 생각을 현실화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줌도 채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인정하는 것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몫.

그 인정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꽤 방황할 수밖에 없을 텐데...


난 방황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온 것일까?

그런 이유로 온 것일까.


어찌 되었든 지금은 그저 이런 식으로 산책을 계속해 보고 싶다.


2013년~2014년 07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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