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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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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Apr 14. 2016

떠나 있지만 떠나고 싶다


한 주에 이틀 혹은 사흘을 쉰다. 물론 요일을 정해 놓고 쉴 만한 직종은 아니기 때문에 보통 체크인과 체크아웃이 없는 날, 즉 일손이 적게 필요한 날을 살펴서 월 초에 미리 휴일을 정해 놓는다. 성수기 피크의 몇 주가 지나고 나니 주방 달력에 쳐진 동그라미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날들도 종종 있다. 바로 다음 주말이 그러한데, 때마침 지인들이 간사이 쪽에 방문할 예정이었기에 미리 휴일을 맞춰 둔 상태다.


"문제없을 것 같네요. 가서 재밌게 놀다 와요."


철이 조금 지난 미나츠키水無月라는 팥과자를 우롱차와 함께 먹으며 여주인에게 휴가 계획을 재차 확인하는 중이다. 한국에 있을 때 잠깐 동안 도왔던 옷가게에서 오사카 한큐 백화점 이벤트홀을 빌려 행사를 여는 모양이다. 도쿄와 서울에서 각각 응원군들이 참여하기로 했고,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 이번 휴가의 주된 일정이 될 것이다.


그것이 주된 일정이긴 하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자면 일정 따위는 별로 상관없는 느낌. 슬럼프일까. 아니 매너리즘이라고 해야 하나. 이 여름 동안 교토를 꽤나 사랑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단기여행이 아닌 일상으로서의 일 년 간. 오로지 이곳에서만! 이대로 마지막까지? 글쎄... 내가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는 은자였다면 교토보다 나은 곳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아직은 젊은 내게 너무나도 수수하기만 한 이곳에서의 삶은 자극이라는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친구들과 시끄럽게 떠들어 본 것도 어쩐지 먼 옛날의 기억만 같고. 답답한 한 숨을 돌리고 싶었던 참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매일 보는 사람들과 조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줄 것이기에. 물론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게 하진 못하더라도 마음의 환기 정도는 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





당일 연지색 한큐선을 타고 우메다역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한국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다. 쇼핑몰 한국 지점 담당인 고베 출신의 재일교포 형 K와 동행한 모델 A군. 그들과 같이 식사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 이미 휴가 기분에 마음이 싱숭생숭. 하지만 곧 해산해야 했다. 오후에 있을 행사 준비로 백화점에 미리 들어가 봐야 한단다. 두 사람을 배웅하고, 도쿄에서 내려오는 또 한 팀을 맞으러 약속 장소인 오사카 제국호텔로 향했다. 작년 겨울 서울에서 단 한 번 봤던 그들. 이렇게 서로의 고향이 아닌 곳에서 재회한다는 신기한 인연에 어쩐지 기분이 들뜬다.



제국호텔 일층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연락을 기다리는 가운데 기억 속에 떠오르는 혼성 삼인조의 얼굴들. 모두 놀랄 만큼 시끌벅적한 사람들이지. 교토의 고즈넉하고 세련된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일본인의 스테레오 타입을 한참 벗어난 사람들이랄까.


이윽고 울린 전화를 받고 일어서자 로비 저 멀리 그 얼굴들이 보인다.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사이에 이미 수십 마디의(내용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을) 말들이 왁자지껄 쏟아진다. 아마도 이 이틀간은 그들의 충만한 에너지에 그저 이끌려가기만 하면 되리라. 매사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가벼워지는 것 같다.



"오사카에 왔으니 쿠시카츠를 먹어야겠지?"


룸에 대충 짐을 풀고 이끌려 간 첫 번째 이벤트는 저녁식사였다. 꽤 유명한 가게였을까, 웨이팅이 필요했다. 띄엄띄엄 비어 있는 자리를 당겨 앉으면 우리 네 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국이었다면 가게 주인이 나서서 손님들을 부추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먼저 온 손님들이 우리에게 자리를 당겨 주려고 하자 오히려 주인 측에서 손을 휘두른다. 앉아 있는 손님들에게 편하게 드시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것은 문화의 차이인지 아니면 이 가게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신선한 장면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우롱차와 양배추를 곁들여서 몇 가지 종류의 쿠시를 시켜보았다. 쿠시카츠보다는 사진 속에 끓고 있는 저것이 제일 맘에 들어서 몇 번이나 시켰었는데, 이름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가게는 친절했고 친구 말처럼 오사카에 왔다면 한 번쯤 먹어줄 만한 음식이긴 했지만, 어쩐지 다시 찾고 싶은 맛은 아니라는 게 모두의 의견이었다.

밖으로 나서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노점에서 빨강 파랑 노랑... 촌스럽기도 하거니와 쓰기에 너무나도 작은 비닐우산을 사들고 사이좋게 걸어가는 신세카이 거리가 매우 흥겹다.





한큐백화점 꼭대기층 이벤트 홀 구석에서는 과연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아시아의 패션을 일본에 소개한다는 콘셉트로 지인이 만든 브랜드. 그 쇼핑몰의 현지 팝업 스토어라는 형태로. 이번에는 오키나와의 꽤 이름 있는 도자기 가게와 콜라보레이션도 진행된다는 이야기다. 어째서 도자기 가게와 옷가게가 콜라보레이션 같은 것을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한국 동대문발 의류를 일본에까지 와서 배나 비싼 가격으로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날이 날인만큼 티셔츠 한 장 정도는 사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구경하다 보니 웬걸 유명 일본 브랜드가 입점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큰 맘먹고 칠천 엔짜리, 지금 나에겐 꽤 큰 금액의 셔츠를 하나 골라보았다.


"그거 괜찮지? 원래는 만 사천 엔짜리인데 이번만 반액 할인이거든. 사이즈 엘 줘야 하나?"


재일교포 형 K가 어느새 나타나 참견한다.


"그래도 모델씩이나 했던 내가 왔는데... 한 장 공짜로 줘도 괜찮지 않아?"


"전혀 안 괜찮아."


"..."


행사를 진행 중인 친구들과 계속 있어봤자 방해만 될 뿐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시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러한 점도 나에겐 신선하게 와 닿는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놀 때는 한 번 집 밖으로 나가면 그 다음날 새벽에 들어갈 때 까지도 중간 휴식 같은 것은 없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본이나 혹은 다른 나라 친구들을 만날 때에는 일단 숙소부터 잡아 놓고 중간중간 들어가 씻기도 하고 옷도 갈아입곤 하는 것을 목격한다. 놀이문화에 여유가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같이 체력이 부족한 타입의 인간에겐 꽤 반가운 스케줄 배치가 아닐 수 없다.


호텔 룸에서 빈둥거리며 반 이상이 실없는 소리였을 대화를 나누는 것도 지쳤을 즈음 해가 저물었고, 무리들 중 한 친구의 생일파티 겸 디너를 위해 다시 밖으로 나섰다. 미리 예약해 둔 고깃집이 있는 요도야바시까지 걷는 동안 강물에 비친 시청 건물이 아름다웠다. 오래간만에 보는 도회지의 밤 풍경은 마음 구석구석을 개운하게 했다. 날은 무더웠지만 요도가와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흐른 땀도 또 그런대로 식혀주고 있었고.


얼마만에 먹어보는 소고기지.


교토 요지야에 들러 미리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내자 모두가 놀란 모양이었다.


"너 어쩐지, 가방은 호텔에 놔두라고 해도 끝까지 갖고 나간다고 하더라."


"너한테 이런 귀여운 구석도 있었는지 몰랐는데."


당사자 친구도 꽤 감동한 제스처. 작은 선물이었지만 사 오길 정말 잘 했구나. 뒤늦게 합류한 백화점 팀과 술을 한 잔 두 잔 주고받으며 즐거운 저녁시간이 무르익었다. 그러고보니 일본에 건너와서 본격적으로 마신 것은 오늘이 처음이네. 술기운 탓인지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또다른 내 모습이 실체를 드러낸다. 그간 쌓였던 생각들을 일본어 반, 한국어 반 섞어가며 거의 토해내듯 지껄이고 있는 나. 교토에 살면서 한층 어두워졌던 그 청년은 오늘 밤 조금 더 취해도 좋을 것 같다.




"어디 가서 한 잔 더 할까?"


모두들 약간씩 취기도 올랐고, 여름밤인 데다가 어쨌든 여행객 신분이었으므로 들뜬 기분을 감출 필요가 없다.


"도야마에 가자. 나 노래 부르고 싶어졌어."


고향 하카타에서 상경해 가수 데뷔를 목표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유쾌한 친구 Y군이 제안하고 나섰다. 겉만 봐선 목소리 크고 털이 짙은 전형적인 큐슈남자 분위기지만 그 속에는 조금 특별한 영혼이 들어있는 친구. 그가 정했다면 모두가 따라야 한다. 우메다역 근처 도야마에 있는 바 중에서 아무 데나 들어가 보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행동대장 Y군을 따라 걷다 보니 길 가운데에 삼삼오오 짝을 지은 무리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에게 서슴지 않고 다가가 쉽게 말을 거는 저 모습. 정말로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세계 어디에서도 흔치 않을 성격이다.


"거기 형들, 여기 봐봐요, 취했어요? 혹시 우리 같은 팀이 놀만한 가게 알아요?"


귀를 의심케 하는 회화 기술. 상대방을 압도하고 만다. 물론 우리들도 상대방들도 폭소 일색.


난 한국이든 어디든 지역색을 믿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혼성에 나이는 뒤죽박죽인데다 외국인까지 섞인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친절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세계에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이 날은 오사카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가게 되었다. 모두들 유쾌하고 열린 마음이었기에. 그들은 흔쾌히 가게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같이 놀자고 나섰다. 그렇게 처음 만난 친구들과 가라오케가 딸린 숏 바에 들어섰다.



그 뒤로는 뭐 예상한 대로 Y군이 가게를 점령하는 수순이었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시대를 넘나드는 레퍼토리와 그에 곁들인 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성량은 덤이고. 남이 예약한 노래를 가로채 부르면서도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게 만드는 신기한 재능에는 언제나 감탄하곤 한다. 그렇게 오사카에서의 낯선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녘, 이미 취할 만큼 취해 다음 차로 이동하는 중에 Y군이 손을 잡아끌었다.


"저기 요스코, 라멘 맛있지. 먹고 가자."


요스코(양자강)의 시오라멘.


내 취향에 맞는 깔끔한 맛의 시오라멘을 파는 가게였다. 한국에서 문을 연 일본 라멘집 태반이 돈코츠 국물만을 고수하고 있는 현실을 난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시오가 이렇게 맛있는데. 십여 년 전 이대 앞 일본 라멘집에서 일했을 때 처음 맛 본 뒤부터 내 입맛은 언제나 시오다.


"도쿄로 올래?"


"그럴까. 근데 가서 무얼 해?"


"교토에서는 무얼 하는데?"


"일하고 있지... 돌아다니기도 하고."


"도쿄에서도 일 하면 되겠네. 돌아다니는 건... 음... 교토에서 걷는 것보다 도쿄에서 걷는 게 어려운 일인지 한 번 알아봐 줄게."


"실없긴."


"친구랑 같이 살고 있는 거 알지? 집 꽤 넓어. 기왕 일본에 왔으니까 여러 군데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난 언제나 환영이니까."


"그 친구도 환영할까?"


"내가 환영이면 걘 당연히 대환영이지."


"여전히 제멋대로네."


"한 번 생각이나 해 봐. 교토 같은 데 뭐가 재밌다고 일 년 씩이나 있으려는 거야."


"말이라도 고마워. 선택지가 생긴 것 같아서 마음 든든하네."


"어른스러운 척하지 말고 삶을 좀 즐기라는 뜻이야. 도쿄에 온다면 훨씬 재미있는 일이 많을 걸? 오늘 멤버들도 여간해선 이쪽에 올 일 없잖아. 사이타마에는 저기 사무실도 있고 하니 K군이랑 A군도 도쿄엔 자주 놀러 올 테고."


"그래. 그러네.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 빨리 먹어. 가서 합류해야지."



사람들과 섞이기 싫어하면서도 끊임없이 외로워하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청년의 얼굴이 맑은 시오 국물에 비쳤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 모양이다. 그는 오롯이 홀로 있을 수 있는 곳에 남아 맘편하지만 철저히 외롭게 지낼 수도 있다. 혹은 깊은 사귐이 불러일으킬 많은 실패들을 무릅쓰고 굳이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한 발 내딛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선택일까. 어느 쪽이 덜 후회할 선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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