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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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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Apr 23. 2016

사람들


여관은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쳐가는 곳이다.


청년


일과 후 나 홀로 티타임. 누군가 오피스 문을 두드렸다. 어제 일층 이인실에 혼자 체크인했던 중국계 프랑스인 청년이었다. 나이는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겼을까. 우리 여관에서 가장 비싼 정원 딸린 일본실에 혼자 묵을 정도니 아마 부자 부모를 둔 모양이지. 검은 피부와 강렬한 외까풀 눈매는 제쳐 두더라도 대충 걸친 유카타 사이로 보이는 문신에는 적잖게 당황해버렸다. 오피스 문밖으로 심리적으로도 몇 발자국은 떨어진 그 싸늘한 입가가에는 삼가는 기색조차 없다. 아마 여주인을 찾는다는 의미였을 몇 마디 영어만이 퉁명스레 흘러나왔다. 그 경계심 가득한 태도에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웃음 지으며 그녀의 부재를 설명하자 의외로 공손하게 인사하고 돌아선다.




그를 다시 본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레셉션에 다소곳이 앉아 여주인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은... 와, 어제와는 거의 딴사람 같은데. 


"자꾸만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길래 빠져나오느라 힘들었어요. 그는 중년 여인에게 끌리는 타입인 걸까? 어머니에게 어떤 콤플렉스가 있나?" 


"..."


"정말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끝도 없이 상대해 줄 순 없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기뻐 보이는 여주인이었다.



마유미상


여주인의 고향 친구 마유미씨가 저 멀리 미야자키에서 일을 도와주러 오셨다. 여주인 혼자서는 체력이 부칠 나이인데다 일거리는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 터라 스텝들의 점심식사를 제대로 챙겨줄 사람이 하나 더 필요했던 것이다. 교토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향신료들을 한 보따리 짐에 싸 올 만큼 조금 구식이지만, 활달하고 밝으며 매사를 깔끔하게 구별 짓길 좋아하는 성격의 그녀. 정치적 신념 또한 깔끔하게 정립되어 있는 듯하다. 어느 날 내 휴일에 맞춰 같이 교토 한 바퀴 산책하러 가자고 권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고 따라나섰지만, 돌아오는 길 카모가와 강변에 앉아 들었던 그녀의 이야기에 기분이 복잡해졌던 일이 있다.


"일본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기름 문제도 그렇고 서구의 압박을 더는 견뎌낼 수 없는 때였거든."


"아... 그런가요."


식객 입장의 이방인인 내가 무슨 대꾸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와는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지만, 정치적인 이야기나 피겨스케이트같이 두 사람 다 할 말이 많은 주제는 되도록 꺼내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키리


로쿠하라 거리 골목 빵집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던 키리짱. 호주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에 외모로는 완벽한 서양인인 그녀이지만, 언어는 영어보다 일본어에 훨씬 익숙하다. 미대에 다니고 있는 그녀는 도자기를 만드는 남자친구와 함께 졸업 후에 중국 광저우로 유학하기로 결정한 듯.


어느 날 빵집에 들른 여주인의 눈에 띄었던 그녀는 우리 여관의 리셉션 업무를 권유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교토에서 영어가 가능한 현지인을 찾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레셉션 업무가 주가 되겠지만 짬짬이 객실 청소도 도와줘야 하기 때문에 결코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여주인의 설명을 듣고도 태연히, 


"청소요? 문제없어요. 저에게는 일도 아니죠."


그 당돌한 한 마디를 듣고 더 볼 것 없이 채용했다는 여주인의 결정은―――아주 옳았다고 본다.



그런 사람들


해외여행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나로서는 정확한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우리 Y관의 숙박 요금은 중대형급 비즈니스호텔의 경우보다 훨씬 비싸지 않은가 싶다. 특히 욕실과 화장실이 공용이라는 점을 따져본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한 세기 전에 지어진 쿄 마치야의 좁은 실내. 너무나도 낮은 천장. 문지방을 넘어설 때면 항상 머리를 부딪히기 일쑤인데, 덩치 큰 서양인들이라면 오죽하겠는가. D거리 쪽에 있는 또 다른 렌털 하우스엔 예약 시 체중을 체크해서 구십 킬로 이상이라는 대답이 온 경우에는 정중히 거절할 정도니까. 그럼에도 우리 손님들의 구 할 이상은 서양인. 거의 백 퍼센트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한국에서 젊은 커플이 손님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예약하고 온 손님은 아니다. 여주인의 초대로 온 손님들이다. 그러나 여주인과 그들은 아는 사이가 아니다.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했을 무렵에는 교토에 올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후보지는 도쿄 한 곳이었다. 친구들도 모두 도쿄에 살고 있는데다, 간단한 아르바이트라도 구하려면 역시 수도권에 사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가벼운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것이 어떤 블로그에서 위탁받아 올린 모집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무심히 메일을 보내 본 것이 바로 면접으로 연결. 합격하게 되어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여주인은 내가 소개된 것에 매우 만족하셨고, 언젠가 그 블로그 운영자분께 답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료 숙박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었다. 그것이 몇 번의 커넥션과 사양을 거쳐 결국 자신이 직접 오는 대신 지인들을 보내온 것이다.


그런데...


편견일 수도 있다. 동양인에 대한 편견, 젊은 사람들에 대한 편견, 혹은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한 모럴해저드가 실재한다고 믿는 내 편견.


그러나 고쳐 생각해 본들 가관은 가관이었다. 공짜로 숙박을 제공한다면 적어도 작은 과자라도 하나 마련해서 오는 것이 상식이라는 내 생각은 그들의 '가관 목록'에 들어가지도 못 할 정도로 많은 추태를 남기고 떠났다.


안내를 받지 않고 멋대로 대문을 들어가는 점부터 시작해서 자신들의 방이 아닌 곳을 기웃거리는 점(심지어는 그들에게는 가장 좋은 방을 내주었는데도!), 귀가 통금시간을 지키지 않는 점, 샤워시간을 지키지 않는 점, 방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더럽게 쓰는 점. 특히 이것은 대단했는데, 병풍 뒤에 한 무더기 쓰레기를 숨겨 놓는 매너에는 차라리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차라리 이때 여주인이 고향에 내려가 계셔서 다행이었다. 함께 그들을 마주했더라면 같은 국적의 사람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웠을 테니까.

 

여관이란 그야말로,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쳐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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