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어림잡아도 일흔은 훌쩍 넘기셨을 미야자키의 할아버지. 농촌의 고된 삶으로 그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하나 둘 따라붙은 지병 탓에 벌써부터 고생스러운 말년을 보내고 계신다 들었었다. 무슨 일이건 말없이 버티는 것이 천성인 큐슈 할아버지도 결국 올여름 더위까지는 못 이기셨고,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에는 설상가상으로 전립선암까지 발견했다는 비보였다.
"아무래도 미야자키로 돌아가는 거... 좀 앞당겨야겠어요."
매일같이 식탁에 올라오는 현미밥과 채소들. 그 밖에도 과일이며 떡이며 초밥이며 여러 가지를 보내주시는 미야자키의 할머니 할아버지께 나 또한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입맛을 잃은 그녀를 위해 오이를 몇 개 꺼내 스노모노를 만들어 드렸지만 거의 입에 대지도 않으시며 말씀을 잇는다.
"올해는 휴가 기간에도 일을 부탁해야 할 것 같네요. 정말 미안합니다."
여름 성수기가 마무리되면 이 주 정도는 가게를 닫고 며칠간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이 료칸의 전통(전통이라고 해 봐야 몇 년 안 되었지만)이다. 그러나 올해는 그녀의 아버지처럼 오랜 세월을 산 이 료칸 건물도 이곳저곳 수리할 곳이 나타나는 바람에 온천에서 일박할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대신 가까운 오바마小浜에 스시라도 먹으러 가자는 것으로 타협을 했었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그것조차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스텝들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게 되었다며 사뭇 미안한 표정을 짓는 여주인. 나야 여행 같은 것은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지만. 다만 몇 안 되는 대화 상대였던 여주인이 갑작스레 떠나버리면 사이가 서먹한 한국인 스텝과 단 둘이 남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익호 군이 걱정이지만... 잘 버텨주었으면 해요. 따지고 보면 이런 것도 일의 한 부분일 테니까.
알고 있어요. 그와는 잘 지내지 못하고 있죠. 전에도 말했던가?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을 거예요. 복도를 걷는 소리나, 밥 먹을 때의 습관이나, 하다못해 세수할 때 코 푸는 방법까지... 무엇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는 걸."
"전,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지는 나도 잘 몰랐지만 딱히 다른 대꾸할 거리가 없었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일단 요 날에는 미야자키로 돌아가야 해요. 그런데 우린 아직 예약이 남아있죠? 이 곳뿐만 아니라 D거리와 M거리 쪽에도...(여주인은 이 곳 'Y관' 외에도 두 채나 더 렌털 하우스를 경영한다)."
그렇게 달력을 짚으며 잠시 동안 설명하고, 생각하고, 따져보고, 생각하는가 싶더니.
"정했다. 오늘은 쉬세요."
"..."
"집을 비웠을 때 많이 힘써줘야 하니까. 오늘은 체크인도 아웃도 없는 날이니 내가 혼자 할 수 있을 거예요. 산책이라도 다녀오면 어떨까요? 매일 다니는 교토 거리라 지겨우려나?"
집을 나서 미야가와쵸의 돌다다미길을 걸어내려가며 최근의 료칸 분위기를 떠올려 본다. 여주인이나 마유미 씨나 혹은 다른 스텝 분들까지도 그 한국인 청년보다는 나와 훨씬 많은 대화를 하는 편이다. 일 할 때는 물론이고 저녁의 티타임에도 마찬가지. 게다가 그는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모임 따위에 전혀 취미가 없지. 대화의 부재는 료칸 사람들의 정서적인 공감대에서 그를 소외시키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사이 여주인뿐만 아니라 마유미 씨에게도 자주 핀잔을 듣는 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주 그릇을 깨뜨린다며 내게 몰래 흉까지 보는 두 분인데. 그런 식으로 점점 불만의 표출구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가는 그. 내게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이 개운치 않은 기분은 뭘까.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신경을 써 주거나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것 또한 나뿐인 것이다. 통근하는 다른 스텝들은 그렇다 쳐도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그 사람이 나를 달갑게 여길 리는 없을 거야. 그렇다고 그것에 내 책임이 있을까. 어느 정도는 있다고 해야 할까.
일이 이렇게 돌아가게 된 것은 그와 나의 어쩌면 좀 근본적인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능력의 우열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여주인이 말했듯이 다른 타입의 인간이기 때문에. 무뚝뚝하고 강직한 한국인 맏이인 그에게는 시답잖은 일상의 수다 같은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끼어들 수도 없는 영역의 일인 것이다. 그는 일과가 끝나고 식사를 마치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틀어박히는 그런 종류의 남자다.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니야. 하지만 세상은 꼭 나쁜 사람만이 악역을 맡게 되어 있지는 않아. 특히나 이런 작은 사회에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기적인 나는 이 주 씩이나 그와 단 둘이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다. 도쿄에서 Y군이 자꾸만 상경하라며 보채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니 잠시 도쿄에 가서 있어볼까?
도쿄로 간다면, 해방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곳에 간들 새롭게 알고 지내야 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은 없어.'
'모두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야말로 제일 의심해야 될 종류의 인간 아닌가.'
'스스로를 포장해가면서까지 남들과 잘 지낼 필요가 과연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따위 생각들에서 벗어나고 싶다. 마루야마 공원을 서성이는 비뚤어진 마음 한편으로 자꾸만 상한 생각만이 떠오르고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별 것 아닌 일들에 속을 태우는 인간이 되어버렸을까. 환영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조차 내 자리를 하나 못 찾고 헤매고 있다니. 이건 비극이기에는 너무 우습고 어리석은 일이다.
한여름에 비해 확연히 남쪽으로 늘어진 태양은 공원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길게 밀어내고 있다.
이제 곧 여름도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