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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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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y 15. 2016

배고픈 오후


식사란 삶의 의무다. 


노동자 신분인 지금의 나에겐 더더욱 그렇다. 여름 더위가 입맛을 빼앗았다거나, 친구와 다퉈서 기분이 별로라거나, 혹은 그냥 일시적인 변덕으로 '지금은 별로 밥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닌 걸.' 따위의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것도 일을 하지 않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강도 높은 노동으로 숟가락 들 힘조차 없는 날에도 내일을 위해서라면 억지로 밥을 우겨넣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느 시대의 유물일지 모를 수동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는 일이 그 모든 신성한 의지를 꺾어버리는 날도 있는 것이다. 저놈의 밥솥. 도정이 거의 안 된 현미로도 놀랄 만큼 맛있는 밥이 지어진다는 점은 칭찬할 만한 부분이지만 노동자의 주린 배로 한 시간이 넘도록, 기가 막히도록 완성되지 않는 밥을 마냥 기다리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렇게 속이 상하는(중의적인 의미로) 날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맨발에 게타만 질질 끌며 밖으로 나선다. 

집에서 일 분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오반자이 정식을 파는 가게가 하나 있다. 이곳의 매일 바뀌는 오반자이를 난 썩 신뢰하는 편은 아니긴 하다. 그 오반자이란 것들이 주인아주머니의 심혈을 기울인 연구를 거쳐 선발된 것이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가끔 마요네즈 샐러드나 파프리카 조림 같은 것이 나올 때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오반자이라는 말에 '반찬' 이상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온의 한 복판에 있는 가게라면 전통적인 재료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한 상을 얼마든지 낼 수 있을 텐데. 교토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그 특별한 야채들은 다 어디에 치워버리고.


교토에는 다른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작물들이 많은데 말이다


오반자이 정식


하지만 그 맛만큼은 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밥과 국이 무한으로 제공된다는 점도 얼마나 반가운지. 늘 '오카와리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먼저 물어보는 친절한 아주머니와 그의 동생분. 두 번 세 번 부탁하고 싶은 날도 있지만 팔백 엔이 채 안 되는 음식값을 떠올리며 언제나 예의상 딱 한 번만 부탁하곤 한다.


메인 격인 생선이 늘 흰 살이라는 점도 맘에 든다. 가리는 음식은 원체 없는 편이지만 생선의 경우 흰살생선을 훨씬 좋아하기 때문에. 뭐든지 잘 드시는 료칸의 여주인도 익힌 생선만큼은 붉은 살을 꺼리시기에 이 가게를 마음에 들어하신다.  


우리 료칸에서는 조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마츠바라거리에 있어 투숙객들이 쉽게 갈 만한 몇몇 가게를 추천하곤 하는 편인데, 보통 간단한 샌드위치나 오믈렛 등이 나오는 카페나 라멘집이 대부분인 반면 일식을 파는 곳은 여기 한 군데라 그런지 인기가 많은 편이다. 얼마 전 묵었던 한 프랑스인 청년은 거의 매 끼를 이곳에서 해결하고 떠났다. 그 어색하고 서툰 젓가락질로.




식후의 커피와 홍차는 유료지만 가끔 오늘처럼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손님이 드문 날이면 친절하게 내어주시는 경우도 있다. 젖은 통유리창 밖으로 이따금 지나치는 우산들을 바라보며 따듯한 커피를 대접받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산미가 가득한 드립 커피. 한국에서는 늘 에스프레소로 만든 커피만 마셨던 것 같은데. 여기선 도리어 강한 맛의 에스프레소를 찾기가 힘든 편이다. 순간적으로 추출하는 에스프레소보다 이렇게 천천히 내린 커피가 훨씬 카페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로 강렬한 졸음이 올 때엔 그만큼 강렬한 맛의 에스프레소를 찾게 되지만 말이다. 이것도 일종의 이성보다는 느낌에 치우친 삶의 태도일까. 


빗물이 씻은 공기 탓인지 후각과 미각이 적당히 식은 커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렇게 한 끼를 배부르게 해결하고 커피 한 잔을 하며 시간을 때우는 사치. 소박하지만 내게는 지복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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