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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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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y 22. 2016

감기, 또다시


"아버지, 쇼가야끼 만들어 드릴 테니 잠깐 앉아 계세요."


조용한 오피스에 홀로 앉아있던 오후,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적잖게 놀랐다. 여주인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의 출처는 내 휴대폰이었다.


"내년에도 멜론 많이 심어요. 그리고 바질도. 아, 쌀은 사 먹어도 상관없으니까 일부러 도정 맡기지 않아도 돼요."  


미야자키에 내려가 있는 여주인과는 하루에 한 차례 통화하고 있다. 통화의 목적은 그 날의 특이사항이나 스케줄 따위를 보고하고 또 체크받기 위해서. 그러나 사실 성수기가 지나가버린 이 시기엔 비어 있는 객실이 절반인 데다가 스텝들의 스케줄이라고 해 봤자 여름 영업의 마지막 날까지는 며칠 안 남았기 때문에 변동이 있으래야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그 보고란 것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오늘도 그저 한차례 인사만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웬걸,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의 무료통화 모드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였을까? 제대로 끊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미야자키 사투리의 억양은 한국 이북지방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평소에는 도쿄 말씨를 쓰는 여주인도 가끔 고향의 가족들과의 통화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상황에선 점점 미야자키 악센트가 나오곤 했었는데,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강렬한 억양이다. 신기한 일이다. 다른 두 나라의 말투가 이렇게까지 닮을 수 있다니. 한반도 북쪽에서부터 내려온 기마민족이 고구려와 백제 사람이 되었고, 또 왜의 규슈지방까지 진출했다는 역사의 증거가 이 진득한 악센트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본의 아니게 저쪽의 목소리를 엿들어 버린 것을 굳이 밝혀 봤자 불쾌함만 나누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여주인을 부르거나 하지는 않고 가만히 종료 버튼을 눌렀다. 


머리가 조금 아프다. 책임자가 부재중인 곳에서는 아랫사람들의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법일까. 열은 없었지만 온 몸의 신경을 곤두 세운 탓인지 몸살이 올 것 같다. 시조 역의 드러그스토어까지 갈 기운조차 나지 않았기에 집 근처 약국에서 간신히 갈근탕을 구해 복용했지만 글쎄, 되려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감기엔 비타민을 보충하고 쉬는 수밖에 없어요."


냉장고 어딘가에 감춰두었던 휴가나츠 젤리라는 것과 여름 귤을 꺼내 주시는 마유미씨. 그것들은 미야자키에서 올라오실 때 산더미같이 들고 온 식재료들 사이에 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일본에 와서 놀랐던 것 중 하나가 냉장고를 같이 쓰면서도 식재료를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점. 다른 것도 아닌 우유나 주스 한 팩처럼 나눠 마실 수 있는 것에까지 이름을 써 놓고선 각자의 것만 쓰는 행동에 조금 정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곤란할 때 나누어 주는 모습을 보자니 그것은 정 같은 것과는 상관없는 종류의 행동이었나 보다. 트러블을 애초에 피하기 위한 합리적인 생활 방식 같은 것일까.


모양은 레몬 색은 오렌지인 처음 보는 과일


마유미씨와는 피겨스케이팅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가 단절되었던 적이 있다. 아사다마오 선수의 팬인 그녀에겐 밴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우승한 사실이 매우 속상한 일이었나 보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라기엔 유연성이 너무 부족하지 않아?'


어떻게 보면 귀여울 정도의 트집을 잡았을 때 나는 별 말을 하지 않았었다. 이런저런 설명을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코 진실을 원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을 뿐 아닌가. 


감정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렇게 대립관계에 있을지도 모를 마유미씨와 나. 그러나 골골거리는 아들 뻘 청년을 보고도 딱한 마음이 들지 않는 여성은 드물 것이다. 귤 하나 까는 것도 시원찮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유미씨는 아무 말 없이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하셨다. 



생선구이는 료칸 식단의 금지품목. 냄새가 객실로 올라가는 것을 염려한 여주인의 조치였지만, 주인 없는 호랑이굴에서 아무렴 어떤가. 마유미씨는 그런 농담을 던지시며 몇 가지 반찬을 뚝딱 담아 한상 차려내셨다. 한국 무말랭이와 똑 닮은 미야자키의 무 절임, 역시 미야자키에서 가져온 우메보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치리멘을 무즙에 버무린 것. 담백한 시골 식단. 매일 이렇게 먹으면 백 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밥 먹고 약 먹고 올라가서 쉬어요. 오피스아워 끝날 때까지는 내가 대신 남아 있을게요."


"죄송해요. 그리고 저녁식사 고맙습니다."


"뭘, 괜찮아. 우리들 동료잖아. 센토 동료."


목욕탕에 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여주인에 반해 마유미씨는 샤워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다. 집 근처 다이코쿠유나 혹은 저 멀리 미부의 슈퍼센토에 갈 때면 그나마 목욕탕을 좋아하는 나를 꾀어 같이 가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동료라기보단 짐꾼 역할이었지만. 최근엔 열 장들이 회수권(지역 어느 목욕탕에서도 사용 가능한)까지 쟁여두신 모양. 




맛있는 식사와 상큼한 여름 귤 그리고 갈근탕에 기대어 내일은 말끔하게 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며칠 앓는 것은 절대로 피하고 싶다. 타향에서의 감기란 마음까지 갉아먹는 중병이라는 것을 겪어본 사람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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