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를 타고 오사카항을 통해 돌아온 여주인을 좇아 커다란 택배 상자들이 도착했다. 가을 겨울용 옷가지에 오래되어 보이는 커튼, 그리고 자투리 천종류 따위가 들어있는 상자가 하나. 아마 그녀의 부모님이 직접 길렀을 가지며 오이며 하는 야채들로 빼곡한 상자가 하나. 그리고 마지막 하나에는 랩으로 싸 꽝꽝 얼린 오목초밥과 보타모치(팥떡)덩어리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가을 동안 먹을거리는 이걸로 충분하겠는데요?"
"네... 그런데 가지들은 오는 동안 벌써 시들해졌네요. 내일부터 마보나스같은 거라도 잔뜩 만들어서 해치워야겠어요. 멜론을 좀 많이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끝물이라 이것밖에 없었어요."
그녀가 멜론이라고 부르는 연녹색 껍질의 주먹만 한 과일은 가지가 들어있는 박스 구석에 서너 개 정도 굴러다녔다. 여름 동안 여러 번 택배로 받아먹었었기에 내게도 익숙한 그 '멜론'은, 잘라 놓은 모양과 맛으로 볼 땐 한국에서 먹던 참외와 똑 닮은 모습. 그러고 보니 여태껏 교토나 도쿄나 혹은 오사카 어느 곳에서도 참외 비슷한 과일을 파는 모습을 본 일은 없었는데... 한국에서는 흔한 여름 과일인 참외.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 과일은 정작 본토에서는 전국적으로 인기를 끄는 데 실패한 모양이다. 미야자키에서조차 이 '멜론'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녀의 가족들이 먹기 위해 따로 기르고 있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이국에서 이 아삭하고 시원한 여름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걸.
한국의 노란 참외와 속살은 똑같이 생겼지만, 어쩐지 훨씬 달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이름이라는 것에는 신기한 마력이 있는 것이다. 붙여진 그것의 성질을 어느 정도 결정지어버리는 힘. 참외와 똑 닮은 이 과일의 속살에서 멜론에서만 풍기는 그 휘발성의 달콤함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어쩌면 우리들이 이것을 자꾸 멜론이라고 불렀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어머니가 마당에다 바질을 잔뜩 심어놓았더라고요. 우리한테도 좀 보내달라고 했어요. 제노베제 좋아하나요?"
바질로 만든 제노바식 파스타를 먹어본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바질 한 움큼에 올리브유 듬뿍. 그리고 치즈와 마늘과 잣을 약간 넣은 소박한 파스타. 원래부터 익히 알고 있는 맛의 식재료들을 단순히 섞어놓았을 뿐일 텐데도 이런 놀라운 맛이 날 수 있다니.
토마토소스나 크림소스 같은 것들은 집에서 직접 만든다고 해 봤자 슈퍼에서 파는 병조림들보다 훌륭한 맛을 내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 아닌가. 특히 토마토 같은 경우 신선한 상태보다 오히려 가공되었을 때의 가치가 더 높은 식재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 바질페스토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손수 만든 것과 대량생산품의 차이란 퀄리티 차원에서 따질 것이 못 될 정도다. 그것은 차라리 전혀 다른 종류의 물질로 보인다. 이 날 이후 얼마나 많은 브랜드의 바질페스토 병조림을 하수구에 흘려보냈던지.
"페스토를 만들 동안 면을 삶아줄래요? 거기 감자도 서너 개 삶아줘요. 냄비를 따로 꺼내지 않아도 돼요. 면 냄비에 그냥 넣어요."
여주인의 투박한 요리 스타일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오뎅을 만들 때도 계란을 따로 삶지 않고 껍질째 한 냄비에 끓이는 습관을 마주했을 땐 경악을 금치 못했었지만, 이제는 그런 요리법에도 상당히 익숙해진 참이다. 사실 가시적인 영역을 뛰어넘은 청결함의 문제란 결국 주관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익숙해지면 이 정도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되는 법이라는 이야기.
"치즈라곤 가루로 된 파마산밖에 없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네요."
전통적인 제노바식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지 몰라도 어쨌든 이 파스타도 향토음식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온 소박한 소울푸드. 신선한 바질 외에는 별로 좋은 재료라고 할 만한 것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첫 입에서 순간 느껴지는 그 달콤하고도 고소한 신선함은 마치 미야자키의 여름 햇살이 그 곳에 다 담겨있는 듯하다.
도기로 된 절구에 빻아 만든 바질페스토가 조금 남았다. 그것을 병으로 옮겨 담으며 여주인이 말했다.
"새 된장을 가져왔으니 내일은 여기다 또 히야지루라도 해 먹을까요?"
미야자키의 여름 음식 히야지루冷汁. 멸치와 쌀된장을 절구에 곱게 이겨 찬 물을 부어 만드는 일종의 냉국이다. 멸치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그 구수함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거부감 없이 다가올만한 향토음식인데, 무말랭이를 먹는 습관도 그렇고 참외 비슷한 과일을 기르는 것도 그렇고 미야자키에 관해서 알면 알수록 그곳은 한반도와 따로 떼어 놓고는 설명될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여름에 입맛이 없을 땐 히야지루에다 오이만 반 개 썰어 넣고 그냥 후루룩 마시듯 하는 것이 한 끼였을 때가 많아요'
"아버지는 염려했던 것보다는 건강하세요. 밥도 잘 드시고 돌아다니는 것도 문제 없으시고. 당최 말씀을 하나도 안 하시는 점도 그대로셨고요. 그래도... 이제 남은 시간이 많이 길지는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다들 늙어가네요. 아버지도, 저도 그렇고."
"우리 타피도 그렇지?"
카푸치노색 고양이 타피. 여주인이 미야자키에 가 있는 동안 제대로 챙겨주지 못 했던 탓일까, 소변을 못 보는 등의 증세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참이었다.
"도쿄로 가도록 하세요 익호군."
"네?"
"계속 고민하고 있었을 텐데요."
"..."
"교토라는 곳, 참 좋죠? 사실 가장 일본다운 일본은 미야자키라고 생각하지만, 교토도 그에 못지않게 좋은 곳이죠. 나 같은 나이의 인간에겐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전 아마 나중에는 미야자키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할머니가 된 타피한테는 이곳이 마지막 거처가 될 것 같네요."
"익호 군에게 워킹홀리데이의 마지막 거처가 교토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한테도 젊은 사람의 에너지가 없을 리 없는데, 어쩐지 이곳에서는 그 활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모처럼 얻은 해외 생활의 기회를 더 적극적으로 써먹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
"가게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마유미 씨도 도와줄 것이고 또 다른 스텝들도 있잖아요."
"정말 여러모로, 폐를 끼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 봐, 또 그런 식으로 말한다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당신도 교토 남자가 다 되어버렸어. 이곳 남자들 정말 메메시이女々しい(연약하고 여성스럽다)해. 좀, 내가 믿고 있는 한국 남자들 이미지를 보고 싶은데 말이에요."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올 법한 그런 한국 남자의 스테레오타입이라면, 저도 이제까지 목격한 일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나는 그저 애매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조용한 고도에서 멜론을 깎아먹거나 절구에 히야지루를 만들거나 하는 삶의 모습은 지금 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을 일일까.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질려 피신해 온 이국의 풍경 가운데서도 단 몇 달 만에 따분함을 느껴버리고 마는 것은 내 안에도 정말 그녀가 말한 활기에의 갈망이 있다는 뜻일까.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눈치채이기 전까지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말하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한심함이 느껴진다. 그래, 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이것저것 저질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다고 해서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 때엔, 다시 돌아가버리면 그만이다.
도쿄로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