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에서 재회했던 Y군의 도쿄 공연 소식이 들어왔다. 시부야의 작은 라이브 바를 빌려 앨범 발매 기념 이벤트를 열 계획이란다. 공연 때에 맞춰 상경하면 얼마가 되었든 마음껏 묵게 해 준다는 메시지가 무엇보다 반가웠다. 휴대폰 수화기 음량을 최소로 줄여도 어김없이 삐져나오고 마는 그의 높고도 발랄한 목소리는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도 조용하기만 한 이곳 교토의 마치야 건물과 그 안에 사는 희미한 청년의 마음속을 있는 대로 뒤흔들어 놓았다. 그 어그레시브한 에너지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흐릿한 망설임의 덩어리를 말끔히 몰아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며칠 전 여주인에게 상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는 내심 놀랐었다. 오며 가며 이루어지는 일상의 대화 속에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마음을 들키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연륜 즈음엔 나 정도 되는 어리숙한 청년의 마음속쯤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결론은 그렇게 나 버렸다. 반쯤은 타의에 의한 것이겠지만, 나는 교토를 떠나 도쿄로 향할 것이다. 일단 마음을 굳혔으면 곧바로 실행해야 한다. 같은 문제를 여러 번 거듭해 고민하는 것은 절대로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행위는 마치 종이에 쓴 글을 지우개로 여러 번 고쳐 쓰는 작업처럼 종국에는 문제의 본질마저 못 알아보도록 망가뜨려 버리곤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떠난다는 것은 이곳 그 누구의 어떠한 잘못에 의한 것도 아니지만, 새로운 변화의 순간은 언제나 그곳에 있는 모두를 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법. 집 안에서 누구와 눈을 마주쳐도 아하하 웃음만 짓고 마는 그 들뜨고 어색한 분위기에 거북해진 나머지 훌쩍 밖으로 나섰다. 잠시 싸돌아다니다가 근처 골목에 있는 후리앙이라는 양과자점에 들러 밀피유와 에끌레어, 롤케이크를 골라 집으로 돌아간다. 가끔 먹던 슈크림보다는 조금 기분을 낸 간식이다.
여주인과의 마지막 티 타임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후리앙 파티셰의 솜씨를 칭찬하고, 선물 받은 차가 생각보다 맛있지 않느냐는 그저 그런 이야기들만이 오갔다. 사람들은 서로가 불편해질 만한 이야기에는 애초에 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배려일까 혹은 방어기제일까. 어쩌면 둘 다일까.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힘들게만 느껴졌던 일들이나 한국인 스텝과의 불편한 관계나, 그리고 사실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을 크고 작은 사건과 오해들이 전부 애틋하게만 느껴진다. 삐그덕 대는 계단을 올라 이층 구석구석을 다니며 마음속 깊이 새기기 위해 잠시 머물러 바라본다. 이곳에 얼마나 있었다고 이런 감상에 젖는 것일까. 별 것 아닌 일로 크게 상심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그로 인해 고민했던 모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내 삶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는 클리셰다.
도쿄에서는 발랄한 Y군과 그의 하우스메이트 친구, 이렇게 셋이서 지내게 된다. Y군은 일본차를 싫어하기에 교토에서 사 갈 것이 마뜩지 않았는데, 그런 그도 말르브랑슈의 녹차 랑그드샤만큼은 좋아한다고 해서 한 박스 사놓았다. 그리고 함께 생활하게 될 또 한 친구에게는 큰 마음먹고 입뽀도一保堂의 옥로와 호지차를 사놓았다. 신세 지러 가는 처지에 이 정도의 인사는 해야 예의겠지.
"도쿄에 가서도 연락 해. 혹시 돌아오게 되거든 다른 선물은 필요 없어. 토라야의 양갱 하나만 사 와."
이런저런 일들로 조금 소원해졌던 마유미씨도 쪽지 하나를 적어 내미신다. 역사 이야기, 피겨스케이트 이야기 등등으로 견해의 차이를 많이 느꼈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만 센토銭湯를 좋아하는데다 또 좋은 산책 친구가 되어 주시기도 했던 마유미씨. 그리워질 것 같다. 혹 돌아오는 일이 생기더라도 제일 싼 것이 하나에 천엔이 넘는 토라야의 양갱은 생각을 좀 해봐야 될 일이겠지만.
"그럼 오늘은 실력 발휘 좀 할까?"
미야자키에서 오실 때부터 비닐봉지에 향신료며 조미료며 바리바리 챙겨 오신 마유미씨다. 그저 요리를 즐기시는 정도의 실력으로 어떠한 전문성이 느껴지는 솜씨는 아니지만, 여주인이 바쁘신 중에 우리들의 저녁 식사를 항상 책임지셨던 그녀. 일본의 평범한 가정식을 이것저것 경험해 볼 수 있어서 내게는 기쁜 시간들이었다.
"익호 군은 카레 좋아하지? 이거 먹고 힘내서 도쿄에서도 잘 지내길 바라."
언제나 먹어도, 세 끼를 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인 카레라이스. 전에 그녀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가. 용케 기억하고 계셨나 보다.
"감칠맛이 있어서 좋지? 야채는 야채대로, 고기는 고기대로 푹 삶은 거니까 평소에 대충 때려 넣고 만든 거랑은 달라."
"정말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도쿄까지는 교토역에서 야행 버스를 타고 갈 예정이다. 버스시간까지는 아직 수 시간 남았고, 남은 시간 동안 스텝들과 오피스에 모여 어쩌면 마지막이 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제 내일이면, 동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