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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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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Sep 02. 2016

SANS LE SOU

도쿄 -1-

도쿄도 스기나미구 아사가야에서의 첫 한 주는 설렘으로 충만했다고 평가할만하다. 늘 느릿하고 고요하기만 할 뿐 가끔 소박한 복작거림 정도가 고작이었던 교토의 마치야에서 한여름을 보내는 동안 풀이 죽을 대로 죽어있었을 삶의 긴장감은, 도회지 아케이드의 한가운데에 있는 고급 맨션(지금 내 주제에는 퍽 어울리지 않을 만큼 비싼 월세의)으로 이사 왔다는 사실에 한 차례 충격을 받았을 테고, 그곳에서 같이 살게 된 Y 군이라는 남들 곱절 이상의 에너지를 가진 인물과 일상을 공유하게 됨으로 인해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이야기.


그렇게 요 한 주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지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Y군의 행동반경을 따라다니는 것만으로 충분히 바빴다. 오전에는 도쿄체육관 수영장에서 Y군의 무료 레슨(그러나 엄격하고 또 꽤 본격적인)을 받고, 오후에는 긴자의 고급 카페나 쇼콜라트리에 들어가 값비싼 디저트들을 하나씩 섭렵하기도 하고, 저녁에는 신주쿠 일대의 백화점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가끔은 주머니 사정에 맞는 쇼핑도 시도해 보았다.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는 스기나미구의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작은 가게들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곳들은 대부분 혼자였다면 감히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이른바 '동네 사람들의 단골집'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든든한 아군이 늘 동행중이라는 말씀. 메뉴에는 사진 한 장 없이 오로지 손글씨로 갈겨놓은 문자만이 가득한, 그런 로컬 음식점에서의 식사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꽤 익숙하다고 자부하던 나에게도 신선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계란말이가 인상적이던 히로시마야끼 가게


하지만 신선함이란, 결국 신선함일 뿐이었다고 해야 할까.


하루가 또 지나고 다시 찾아오는 밤. 잠자리에 들어 올려다보는 천장이 더 이상 낯설어 보이지 않게 될 때쯤이면... 잔뜩 달아올랐던 삶의 긴장감도, 새로움의 물기를 머금고 뛰기 시작하던 심장도, 어느새 축 늘어진 푸성귀마냥 생기를 잃고선 일상이라는 잡동사니 속에 저만치 처박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Y군으로부터 상르수에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은 이때쯤이었다. 집에서 전차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소박하고 적당한 가격대의 프랑스 요리점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제대로 된 환영회라고 하기엔 두 사람뿐이니까 조촐하겠지. 그래도 조금 제대로 된 곳에서 식사 한 번 해야 하지 않겠어."


니시오기쿠보에 위치한 상르수. 가게 이름으로 붙이기에는 조금 의문이 남는 센스다. 하지만 흥미를 끈다. 


조금 이른 저녁시간, 계단을 올라 이층 가게로 들어서는 우리를 약간 기가 세 보이는 것이 비단 화장 탓만은 아닐 듯한 마담이 나와 반갑게 맞았다.


"아, 당신은... 조지? 조지였죠?"


"마담, 조지는 제 미국 친구라구요. 전 마에다예요. 게다가 그 친구는 혼혈인데 어떻게 저랑 헷갈리실 수가 있어요."


"아, 그랬지 참. 하하하. 실례했어요. 하지만 당신도 조지 못지않게 이국적인 얼굴인데 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서 느껴지는 친밀함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에서 형성되는 그런 종류의 기류는 아니다. 그저 두 사람의 타고난 사교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누구든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언제나 어느 장소에서나 그 누구와도 손쉽게 이야기를 섞을 수 있는 저런 사람들은 가끔 나를 넋 놓게 만들곤 한다. 무엇을 숨기랴, 부럽다는 이야기다. 어떤 점이 부러운가. 그들의 밝고 적극적인 성격?... 아니다. 내가 감탄하는 것의 초점은, 태도의 일관성이라는 점이다. Y군은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언제나 큰 목소리로 활기차게 대화를 시작한다. 그 모습에서는 결코 연습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불가사의한 힘마저 느끼게 한다. 물론 그것은 내 오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런 성질은 그의 삶을 꾸려나가는 큰 재산이 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저런 성질을 타고나지 못한 나와 그 밖의 보통 사람들은 앞에 있는 상대에 따라서 스스로가 갖고 있는 것의 크기가 수시로 바뀐다. 

태도, 마음가짐, 목소리, 뭐든.




메뉴는 간단한 코스였다.

 

전채로 나온 야채 테린느
메인 소 볼살 와인조림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사실 프로마쥬와 빵
디저트 초코무스


"홍차랑 인퓨전을 직접 시험해 보고 고를 수 있어서 좋다. 종류도 많고." 


"그럴 줄 알았어. 익호 넌 전부터 차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 환영회로 여길 고른 이유 중 하나야. 어때? 본격적인 프렌치 레스토랑이랑 비교하긴 좀 그래도, 요리들도 그럭저럭 괜찮지 않았어?"


"맛있었어. 비교고 뭐고 사실 이제까지 제대로 된 프랑스 요리를 먹어 본 적도 없는데 뭐. 기껏해야 오믈렛 정도가 전부였을 걸."


"도쿄에 와서 좋았던 점 하나. 여러 나라 음식들을 집 근처 가볍게 찾을 만한 가게에서도 즐길 수 있다는 점이야. 물론 리즈너블한 가격에. 우리 고향에선 이런 가게는 아마 찾기 힘들지."


"그건 서울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글쎄... 사실 나한테는 이 정도도 리즈너블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여행자 신분이니까 가끔 이 정도 기분은 내도 괜찮겠지."


"그럼 돌아가는 길에 아까 이야기했던 포도 사 줘. 그 기분으로 말이야."


Y가 일하고 있는 긴자의 바에는 종종 백화점 지하에서 이목을 끌 용도로나 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싼 과일 같은 것을 사 들고 와서는 모에에샹동을 몇 병이나 까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한 송이에 사만 엔이나 하는 포도 같은 걸 말이지. 


"안 돼. 그거 한 번 사 먹으면 완전히 '상 르 수'일 걸."


"알고 있어. 당연히 농담이지. 이제 그만 일어나자. 마담한테 빵을 잔뜩 얻어서 돌아가자. 대신 다음번에 올 때에는 익호가 한국 요리 만들어서 사시이레로 들고 오는 거야."


"제멋대로네. 하지만 좋아. 닭도리탕이라도 한 냄비 만들어서 가져올까."


Y군은 크게 웃었다.


"또 국물요리! 프렌치 비스트로에까지 와서, 메인 디저트 할 것 없이 전부 국물만 시키더니만. 한국인다워 한국인."


"시끄러워. 문자정보만으로는 어떤 요리가 나올지 알 게 뭐야."  


내가 시킨 메인 요리였던 소고기 조림이 한국 갈비찜 맛이랑 똑같다고 했을 때부터 내내 '과연 그러시겠죠'를 연발하며 놀림조였던 Y군의 기세는 급기야 디저트로 복숭아 쁘띠뽀가 나왔을 때 클라이막스에 다다랐었다. 

한국인 = 국물요리라는 마음속 공식에 혼자 신이 난 것이리라. 다음번에 올 땐 반드시 스테이크를 시켜야지.  




도쿄에서의 삶도 이런 식으로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딱히 앞으로의 계획은 없다. 거처를 완전히 도쿄로 옮기는 것도 아니기에 교토 쪽에 아직 짐이 남아있기도 하고. 앞으로 오사카에 올 친구와 같이 생활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앞으로 몇 주간은 더 뜬생활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그저 주어진 매일매일을 즐기는 것이 정답 이리라. 어느새 여름은 완전히 기울었다. 내 여행도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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