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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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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Oct 02. 2016

동경 사람들

도쿄-2-

Y군



나를 도쿄로 이끈 장본인.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 일본 사람들에 대해 막연히 품었던 고정관념을 단번에 깨 부순 인물. 그리고 현재 내게 가장 중요한 주변인, Y 군이다. 성은 마에다. 그러나 지난겨울 서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이름을 알맞게 줄인 '야스'로 쉽게 불러대고 있다. 

가수가 꿈인 그는 얼마 전에 자비로 앨범을 내기도 했는데, 그 기념 라이브는 야스 본인뿐만 아니라 가스펠 가수분들을 필두로 여러 동료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한데 모인 제법 큰 파티가 되었다. 그의 타고난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성격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를 따라 시부야 등지의 라이브 하우스를 몇 군데 경험한 것은 도쿄에서의 값진 추억이라 할만하다. 그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발을 들여보지도 않았을 장소들. 나와는 웬만해선 상관없었을 종류의 사람들. 


여러 곳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도 만나고 다니는 요즘이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이 몹시도 서툰 주제에 말이다. 



"익호는 수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앨범을 다섯 장이나 사 줬지. 그건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과장된 제스처를 섞어서 요란하게 감사를 표하는 Y군. 그러나 만엔어치 앨범의 감동이란 분명 일 년도 못 갈 것이다. 그는 때때로 나만큼 감상적이긴 하지만, 나만큼 그것에 푹 빠져있지는 않는다.   


 

하-쨩


아사가야의 맨션에는 한 명의 하우스메이트가 더 있다. 성과 이름이 둘 다 '하'로 시작하기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은 그를 하-쨩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이것은 Y가 맨 처음 붙인 별명이다. Y가 장난 삼아 한 번 그렇게 부른 뒤로는 모두가 그를 하-쨩이라 부른다. 

아무튼 하-쨩은, 현직 치과의사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치과의사의 사회적 위치란 한국의 상황과 비교해 보자면 상당히 낮은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다른 의사들에게는 의사로서의 취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의사라는 직업이란 고학력을 필요로 하는 고소득의 전문직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 직명에서부터 느껴지는 무시할 수 없는 레벨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Y군이나 나나, 혹은 주변 친구들이 하-쨩에게 어떠한 경외심을 품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생활수준이라는 면에서 우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 사실 Y가 애초에 이 고급 주택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월세의 대부분을 하-쨩이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거 생활이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Y와 하-쨩의 연애는 이미 예전에 끝난 일이기 때문에.



사토코


우리 집과는 JR아사가야역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주택가 쪽에 사는 사토코. 곧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동아시아인 특유의 차분하고 깨끗한 동안을 갖고 태어난 덕택에 실제 나이보다도 훨씬 어려 보인다. 이번에 내가 새롭게 알게 된 도쿄 친구들(이제껏 내가 겪어 온 사람들과는 성격적으로나 성향적으로나 특별한 구석들이 있는) 중에서는 가장 건전하고 어른스러운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외국인으로서의 벽, 언어습관의 차이에서 오는 벽, 그리고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한국인과 일본인 사이'라는, 간단히는 깨부술 수 없을 복잡 미묘한 마음의 벽―――덕택에 고생깨나 하고 있는 내게 따뜻하게, 그러나 조심스럽게 이런저런 사귐을 주선해 주거나 조언을 던져주거나 하는 친구다. 가끔 넘치는 자기 에너지에 못 이겨 실언을 내뱉고 마는 Y군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충돌할 때면 둘 사이에 서서 중재하는 역할도 그녀의 몫. 


밤낮으로 추워진 도쿄 날씨 탓에 자꾸 기침을 하는 내게 쿠즈차(칡뿌리 가루를 열탕에 개 먹는 달콤한 죽 같은 음료)를 보내주는 사토코에게서 모성애를 닮은 따듯함을 느꼈다면 과장일까.


반씩 나눴어! 에이지가 심부름꾼이야



에이지


사토코의 피앙세다. 일본계 브라질인인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만 들어서 알고 있다. 고국에서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와 돈도, 기술도, 제대로 된 일본어 능력도, 심지어는 하룻밤 잘 곳조차 없었던 그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빌딩 청소부 일을 가까스로 얻어낸 것을 시작으로 수년 뒤 지금은 츠키지 시장에서 치리멘을 파는 일을 하고 있다. 산초로 맛을 낸 치리멘에서 교토를 다시 발견한 듯 반가운 마음에 나도 한 통 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값을 치르려 돈을 꺼내자 웃으며 고개를 흔들며 밀어내는 에이지 군이었다. 무뚝뚝하지만 강인한, 그리고 한편으론 소년 같은 마음을 가진 요즘에는 보기 드문 호청년이다. 미국 코믹스를 좋아하고 또 가끔 그런 스타일의 그림을 직접 그려내기도 하는 그는 주변 친구들의 캐리커쳐를 그려 곧잘 선물하곤 한다. 어쩔 땐 너무 소년 같은 행동을 보일 때도 있어서 놀라곤 하는데, 한 번은 사토코가 그에게 시장에서 샐러리를 사 오라고 시켰을 때 '샐러리'의 일본어 철자가 한 글자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사 오지 않았던 적도 있다. 가볍게 웃고 넘기면 될 에피소드지만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음을 염려해서인지 엄청나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에이지와, 잘못된 부분을 확실히 꾸짖고 넘어가는 사토코를 보자면 마음이 흐뭇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어른스러운 사토코와 덩치는 큰데 반해 마음은 여린 에이지.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기쁘게도 이 둘의 결혼을 귀국하기 전에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 




도쿄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대부분 도쿄가 고향은 아니다. Y와 하-쨩은 큐슈, 에이지는 브라질, 사토코만이 요코하마로 가깝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친구들도 지방에서 해외에서 일거리를 찾아, 혹은 꿈을 찾아 도쿄로 와 있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다. 일거리나 꿈을 찾고 있지는 않지만... 나도 도쿄에서 무언가를 얻게 되길 기대한다. 


도쿄에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난방이 에어컨뿐인 도쿄의 밤은 벌써부터 춥다. 종류별로 사놓은 입욕제를 하나씩 시험해 보는 것이 최근의 즐거움 중 하나다.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아사가야의 맨션에 라벤더향 증기가 차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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