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3-
"그 한국인, 아직도 있어?"
짧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아래층 거실에서―아마도 새로운 연인일 사람과―페이스타임으로 대화하던 하-쨩이 다급히 숨죽인 목소리로 외친다.
"당연하지! 지금도 위층에 있단 말야."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소리는 이층 내가 누워있는 방까지 생생히 들리고 말았다.
그렇게 잠시 집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가슴께로 달아오른 아드레날린이 조금 진정되었을 즈음, 아래층의 대화는 이어지는 듯했으나 들려오는 것은 한층 작아진 하-쨩의 목소리뿐. 아이패드 너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헤드폰이라도 연결한 거겠지.
불쾌한 긴장감.
어쩌면 별다른 의미가 담기지 않았을 한 마디다. '한국인'이라는 단어 앞에 구태여 붙인 '그'라는 지시대명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가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쨩의 당황한 태도는 분명 그도 나와 똑같은 걸 느껴서야.'
그렇게 저녁 내내 나와 하-쨩은 말이 없었다. 평소에도 공통분모인 Y군이 없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긴 하지만, 오늘 집안에 깔린 분위기는 평소와 무게감이 다르다. 환절기인데도 방청소를 한 번도 하지 않는 듯한 하-쨩은 집에 돌아오면 거의 하루 종일 콜록거리곤 하는데, 오늘은 헛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뭔가 분위기를 바꿔야 하나. 무엇을 말해야 할까.
"저 하지메... 내가 준 옥로차, 마셔봤어?"
"응? 아니. 아직."
"그래? 녹차를 좋아한다고 해서 일부러 교토 입뽀도까지 가서 사 온 건데."
"응. 맞아. 그렇지. 고마워. 까맣게 잊고 있었네... 지금 같이 마실까?"
어색한 두 남자는 거실에 앉아 차통을 뜯는다. 빨간 캔 안에 든 녹색 바늘 같은 찻잎을 나무 수저로 찻주전자에 한 숟갈씩 옮겨 담는 하-쨩을 바라보다가, 부엌으로 가 일본에서는 티-팔이라고 부르는 테팔 전기포트에 수돗물을 받아와 끓이기 시작했다. 금세 끓어오른 포트를 말없이 받아 든 하-쨩의 손은 한 김 식을 때까지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찻주전자에 물을 쏟아붓고는 한치의 기다림도 없이 잔에 옮겨 따른다. 옥로차란 이렇게 빨리 우러나는 것이었나.
"얼마 뒤면 한국에서 친구 한 놈이 오사카로 올 것 같은데, 그 친구가 오면 나도 다시 간사이로 돌아갈까 해."
방금 전 통화 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남은 워킹홀리데이 동안의 별로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을 주절주절 털어놓기 시작하는 나. 무엇인가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떨쳐내고 싶었다. 하-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려 십수 년 전의 여행 중에 잠깐 마주친 한국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고향에 대한 이야기, Y군과의 짧은 연애 동안 있었던 시답잖은 불만사항들. 페이닥터인 지금 상황이 올해를 끝으로 내년에는 드디어 개업의가 된다는 이야기 등등. 두 번째 세 번째 우린 차가 찻잔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종일관 이어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을, 혹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중간중간 내뱉는 어딘지 맥 빠지는 웃음소리들은 나른하고 소심한 성격의 남자 둘에게 더 이상 쏟아 낼 이야깃거리도 없게 만들었다.
"그만 씻고 잘까. Y군도 슬슬 돌아오겠네."
"응. 나도 내일 출근이니까 먼저 올라가서 잘게. 그럼 잘 자."
목욕물을 받아서 탕에 들어갈까 했지만 괜스레 이곳이 내 집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눅이 든다.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왔으면서 무슨 생각일까. 그러나 인간은 이토록 미묘한 존재인가 보다. 크게 튼 샤워기 소리조차 마음에 걸린다.
대충 샤워를 마치고 백열등이 켜진 거실에 홀로 앉아 남은 옥로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유리 탁자에 널브러진 다기와 과자 봉지. 찻잔에는 물에 불어 미역같이 퍼진 차 찌꺼기가 남아있다. 이층 안쪽 방에서는 간간히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TV를 켤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대로 삼십 분쯤 멍하니 앉아있었을까, Y가 퇴근해 돌아왔다.
"혼자서 뭐하고 앉아있는 거야? 아직까지 안 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감싼 배스타월이 식어 차갑게 느껴진다.
"아, 맞다 맞다. 내일 사토코랑 에이지랑 스튜랑 해서 점심 먹기로 했어. 같이 가자."
"아니, 난 안 갈래."
"... 왜?"
"피곤해."
"내일 일인데 피곤하다는 건 무슨 변명이야."
"몰라,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 다음에 보자. 너나 사토코나... 친구들 다들, 좋은 사람들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때때로 불편해."
들어오자마자 셔츠며 넥타이며 양말이며 속옷이며, 몸에 걸친 것은 전부 거추장스럽다는 듯 훌렁훌렁 벗어젖히는 것이 특징인 Y. 전라가 되어 얼어붙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 속이 꼬일 대로 꼬인 나조차도 헛웃음이 나온다.
"아니야... 방금 건 농담. 그냥 정말 피곤해서 그래. 도쿄 와서 제대로 하는 일도 없어서 그런지 컨디션이 망가졌나 봐. 솔직히 외식을 이렇게 매일같이 할 만큼 여유도 없고."
Y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TV를 켰다. 소리는 거의 죽인 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Y가 TV 앞을 지나 계단으로 향하며 한 마디 던진다. 이쪽은 바라보지 않고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없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데 말이야, 내 친구들한테 불편하다거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였다면 말이야... 너 앞으로도 걔네들 만날 필요 없어."
계단을 오르는 소리, 방문을 닫는 소리, 그리고 남겨진 것은 소리가 없는 TV 화면과 완전히 말라버린 배스타월에 감싸인 초라한 남자 뿐. 두통이 느껴진다. 몸살감기가 들 것 같은 느낌이다. 옛날 어떤 철학자가 말했던가. 인간이란 고독해지지 않으려면 필연적으로 천박해짐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러나 그것도 옛 시대에나 통용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나는 고독으로부터는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삶이란 이렇게 날이 갈수록 천박함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