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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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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Nov 29. 2016

어떤 결말

도쿄 -5-

1.

밤공기가 날이 갈수록 차가워지는 도쿄의 가을, 아사가야의 맨션 꼭대기층은 한낮에도 냉골이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난방기구라고는 각 방에 있는 에어컨 석 대가 전부인데, 이 공기만을 데우는 난방 방식이란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을 만큼 무력한 것이다. 온풍을 켜 놓았을 때만 잠깐 따듯하다가 끄고 나면 순식간에 애써 데워 놓은 공기들이 어디론가 흩어지고 만다. 필시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일 텐데, 지진을 염려한 설계 탓에 집안 모든 창문이 한 겹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그 원인일 것이다.  그렇다고 자는 동안 내내 에어컨을 틀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들은 벌써부터 오리털 이불에 담요까지 꺼내어 단단히 무장한 채 잠들고 있지만, 그나마도 얼굴만큼은 보호할 방법이 전혀 없다. Y군 같은 경우(저래 봬도 음반까지 낸 가수라서 그런지 몰라도) 목을 보호하겠다는 명목 하에 마스크에다 목도리까지 두른 채 잠드는 모양이지만, 난 아직까지는 자유로운 호흡을 포기하면서까지 추위에 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Y와 하-쨩의 겨울이 걱정이다. 이런 냉골에서는 단 한 차례의 겨울을 지내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확 줄어들 것이 틀림없다. 


2.

나는 도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내일 이맘때쯤이면 신주쿠 서전테라스 아래 JR버스 터미널에서 Y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홉 시간 정도 달려 간사이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후회나 망설임 같은 것들이 끼어들 틈조차 없도록 일정을 가능한 한 바짝 좁히려 애쓴 것도 사실이다. 오사카에서 당분간 동거하기로 약속해 놓은 친구가 며칠 전 드디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 빠른 결심의 진짜 이유긴 하지만 말이다.


한 달 넘게 도쿄에서 지내는 동안 몇몇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의 희망적이고 달콤했던 즐거움은 애석하게도 이젠 온데간데없어 보인다. 자잘한 엇나감들이 쌓여 만들어 낸 관계의 실패. 난 또 그것과 마주치고 말았다. 우리 세대처럼 인스턴트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종류의 실패란 것은 너무나도 흔한 일이고, 또 실제로도 숱하게 겪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될 종류의 사건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러나 나와 내 주변의 친구들은 아직 그처럼 굳센 마음은 갖추지 못 한 모양이다. 자그마한 오해와 엇나감들로 비롯된 사소한 속상함들은 여전히 강력하고 부정적인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무겁고 불편한 어색함이란 우리들의 삶을 주눅 들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소통을 서서히 단절시키고야 말 것이다. 하-쨩과 나 사이에 여전히 떠다니는 어색한 기류는 그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한 그리 쉬이 가시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함은 Y군에게로, 또다시 주변 친구들에게로 점점 확대되어가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그날의 한 마디는, 단 몇 주 동안의 시간 동안으로는 쉬이 회복될 수는 없을 만큼 크고 깊은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3.

상황이 이런 식으로 굴러가고 있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내일 떠나기 전까지는 하-쨩에게 제대로 인사를 해 둘 셈이다. 이러건 저러건 생판 모르는 사람 집에서 몇 주 씩이나 신세를 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은 마땅히 감사를 표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빚일 테니까.




1.

Y가 도쿄에서 마지막 런치를 같이 하자며 자기 출근길에 따라나서란다. 점심식사라기엔 시간이 거의 저녁때에 가깝지만 그나 나나 하루의 시작은 오후부터이기 때문에 어쨌든 런치는 런치겠지. 나는 이미 짐도 다 꾸려 놓았고 따로 할 일도 약속도 없었기에 별 말없이 Y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도쿄에서 여러 먹을거리들을 소개해 준 Y가 마지막으로 내게 맛보게 해 줄 메뉴가 과연 무엇일지 기대도 좀 되고. 



예약해 둔 식당에 가기 전에 가게에 들러 오픈 전 청소와 장사 준비를 간단히 해 놓아야겠다며 발길을 서두르는 Y. 그의 원래 출근시간보다 두 시간도 넘게 일찍 도착한 긴자의 바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Y를 보며 나도 바닥 청소라도 도와야 할까 생각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남의 영역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Y의 영역이라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자기 신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까다로운 편이니까. 


능숙하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바의 세팅을 마무리한 Y는 시계를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른다. 예약시간까진 아직도 꽤 남아 있다.


2.

해가 저물기 전 긴자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두툼하고 견실해 보이는 흰색 기모노를 입은 노부인이 한 손에 금박 호랑이가 새겨진 봉투를 들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얼핏 보아도 명품으로 보이는 수트 차림을 한 남자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체형의 비율이나 머리 모양, 손목에 찬 시계, 그리고 얼굴의 생김새로 볼 때 보통의 샐러리맨 들으론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의 에이전시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온 모델들일까. 


나는 교토 식구들을 위한 선물이 필요한 참이었다. 방금 전 노부인이 들고 지나간 금박 호랑이가 붙은 봉투. 그 안에는 분명 양갱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토라야의 양갱 말이다. 문득 상경하기 전 마유미 씨가 내게 던진 한 마디가 떠오른다. 그것은 물론 농담이었음에 틀림없고, 설령 그것이 진심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 주머니 사정으로 토라야의 양갱 같은 것을 사 가는 것은 분수에도 맞지 않는 일일 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쓴 선물이 필요할 텐데. 일본에 건너와서 맨 처음 신세 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Y에게 운을 떼자 그는 대뜸(아마 가까운 곳에 가게가 있었기에 곧장 떠오른 것일 테지만) 짓궂은 어투로, 나이 든 교토 여자들을 위해서라면 딱 좋은 것이 있다며 내 손을 잡아 끈다. 나이 든 교토 여자. 그리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구닥다리 같은 나. Y가 도쿄를 떠나는 내게 가지는 일종의 배신감과 야속함이란 딱 저만한 것이다. 


그에게 이끌려 빌딩 사이의 좁은 골목에 숨어있던 자그마한 가게로 들어서자 안쪽에는 카린토를 포장해 놓은 봉투가 가득 쌓여 있었다.


카린토. 기름에 튀긴 밀가루 과자. 요새는 가늘게 썰어 튀긴 고구마 같은 것들도 죄다 카린토라고 부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제대로 된 카린토란 일단 밀가루에 물엿을 섞어 기다랗게 빚은 뒤 기름에 살짝 갈색 빛이 돌 때까지 튀겨내고, 거기에 설탕물을 묻힌 과자를 말한다. 때에 따라선 마지막에 견과류를 가루 내어 뿌리는 경우도 있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쯤 설명을 들으면 떠오르는 한국의 기성품 과자가 하나 있을 것이다. 


'맛동산'


긴자 타치바나의 카린토는 소박한 튀김과자치고는 상당한 가격대다


1909년부터 카린토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긴자의 타치바나.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가게는 교토에서도 여럿 목격해 왔기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가게 이름으로 유추해 보았을 때 이곳은 아마 황실에 납품하고 있는 가게가 아닐까 싶어 약간의 경외감이 들었을 뿐이다. 타치바나(귤나무)는 예부터 일본 황실의 상징적인 두 나무 중 하나가 아닌가.


맛은 이제껏 먹어본 맛동산류의 막과자들과 비교해 봤을 때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기성품들에는 보통 얇고 긴 종류만 있는 것에 반해 이곳의 카린토는 짧고 뚱뚱한 것도 내놓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밀가루를 튀겨 설탕물을 묻혀 놓기만 한 소박한 과자에 상상 이상의 맛을 기대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만. 

이런 종류의 과자는 고급차의 다과로 쓰기보다는 봉지채 뜯어놓고 마구 집어 먹는 방법이 훨씬 어울리고, 또 맛있게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작은 봉지에 천 엔이 넘는 가격은 선물용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망설였을 것이다. 나는 붉은 틴에 들어있는 선물용의 카린토를 두 개, 그리고 Y군과 하-쨩을 위해서 비닐에만 싸인 작은 것을 두 개 골랐다.




1.

Y가 나와의 마지막 런치를 위해 예약해 놓은 가게는 대형 고층 빌딩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전에 본 친구들이랑도 이따금 오는데, 우리들은 호시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가게야."



사천요리 전문점인 호시상에서 내놓는 점심 코스는 마파두부와 탄탄면이었다. 요리에서는 조미료의 억지스러운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한 맛으로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 매운 요리의 본래 역할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는 느낌.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먹어보는 매운 음식이다. 구기자와 대추, 국화 등을 띄운 차도 음식과 잘 어울렸다. 몇 번이나 뜨거운 물을 부탁했으며 그때마다 종업원은 대롱이 긴 주전자를 들고 와서는 재미있는 자세로 물을 채워 주었다.


흡족할 만큼 맛있는 음식이 주는 것은 육체적인 에너지뿐만이 아닐 것이다. 스산한 도쿄의 날씨도, 최근 들어 얼어붙기 시작한 Y군과의 대화도 슬슬 그 온도가 누그러지고 있다. 재미없는 교토로 돌아가 봤자 또다시 우울해지기만 할 거라는 둥, 오사카에 오게 된 친구랑도 나 같은 성격이라면 같이 오래는 못 살 것이라는 둥 던져오는 농담들의 활기가 예전 그 모습이다. 디저트로 나온 행인두부까지 깨끗하게 비우면서 시간은 그런 식으로 즐겁게 지나갔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쯤 아쉬움을 닮은 감정이 같이 일었다. 이것이 도쿄에서의 마지막 만찬 같은 것이었을까. 


"잘 먹었지. 그럼 난 이제 일하러 들어가 봐야겠네. 넌 어떻게 할 거야? 곧바로 집으로 가면 아마 소화 안 될 걸. 지금쯤 집에는 그분이 돌아와 계실지도 몰라."


"농담 그만둬. 근데, 정말 그럴 것 같다. 혼자서 산책이라도 좀 하다 들어갈까. 그럼 수고하고, 이따 보자."


Y에게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도심을 구경하는 일 따위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다. 회색빛 동경 사람들의 표정을 계속해서 마주치며 걷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모처럼 따듯해진 마음을 해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난 Y를 올려 보내고 나서 곧장 역으로 향했다. JR선을 타고 아사가야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하-쨩. 남은 숙제는 그와의 작별인사뿐인가. 


2.

이제는 익숙해진 현관 앞 캐비닛의 잠금장치를 돌려 Y가 비싼 것이니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며 신신당부했던 묵직한 열쇠를 꺼내 든다. 겉보기에는 그냥 보통 열쇠로 보이지만 Y 그의 말로는 복제하기 어려운 타입의 특수 열쇠란다. 어쩌면 그 말도 내가 도쿄로 오게 되어 한껏 기분이 오른 나머지 내뱉은 허풍들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걸 사용하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일 것이다. 문을 따고 들어서자 따듯한 공기와 함께 TV 소리가 새어 나온다. 


"익호? 오늘은 외출했었나 봐?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조금 놀랐다. 하-쨩이 현관까지 마중을 나오다니. 게다가 나를 기다렸다니. 


"저녁 먹으러 같이 나갈까? 아직 밥 안 먹었지?"


"... 응. 그럴까. 아직 안 먹었지." 


어쩐 일인지 순순한 마음이 들었다. 부담스러우면서도 반갑고, 웃을 수도 찡그릴 수도 없는 기분을 가까스로 추스르면서 이층으로 서둘러 올라가 카린토 봉투며 가방이며 대충 던져 놓고선 그 길로 다시 내려갔다.

 


하-쨩에 이끌려 아사가야 아케이드를 벗어나 어둑해진 골목길로 향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던 히로시마야끼를 파는 작은 가게. 이곳은 아마 하-쨩의 단골 가게인 모양이다. 친숙하면서도 재빠른 말투로 몇 가지 메뉴를 시키는 하-쨩. 난 보통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은 술잔에 기대어 몇 마디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거기에 맥주를 추가했다. 하-쨩도 나를 따라서 맥주를 부탁한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고마웠어. 다음에 도쿄에 오면 또 신세 질게. 


미안해, 그 날 있었던 일. 다음에 또 놀러와.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이국적의 소심한 두 남자가 서로에게 준비했을지도 모를 말들은 자리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즉석에서 구워 나온 부드러운 계란말이가 있었고, 잔을 부딪혔으며, 히로시마야끼라는 처음 보는 종류의 오코노미야끼를 맛있게 해치우고, 또 단숨에 맥주를 비웠다. 그것뿐이었다. Y군과 먹은 사천요리가 채 소화되기도 전에 또 먹는 저녁식사. 더부룩해진 속만큼이나  답답한 두 사람이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모르게, 이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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