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에 들어서면 한해의 절반이 여름인 교토에도 조금씩 가을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지난달부터 아침저녁으로 부는 쌀쌀한 서풍은 드디어 한낮의 바깥공기를 삼십도 아래까지 끌어내리긴 했지만, 가마솥같이 뜨거웠던 분지의 여름 열기를 완전히 몰아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토박이가 안내하는 교토, 궁금하지 않나요?"
료칸의 리셉션 업무를 도우러 한 주에 두세 번 방문하시는 토시상이 꺼낸 이야기였다. 홀로 외국생활을 하는 내게 틈만 나면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다 조언을 닮은 한 두 마디를 섞어 던져주시는 토시상. 몇 년 전 공무원을 은퇴하셨지만 아직 한참 남아있던 삶의 열정을 이제는 캄보디아 교육 자원봉사라는 곳에 쏟고 계시는 훌륭한 분이다.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 또한 각별한 그에게 난 한시라도 빨리 구제해야 될 방황하는 청년쯤으로 비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이 오는 걸 기다리지만 말고 직접 찾아가 봅시다. 하이킹은 좋아하나요? 익호군 다음 주 휴일이 정해지면 제가 일정을 맞추겠습니다. 어떤가요?"
약속의 날 오전 여덟 시 반을 조금 넘은 시각, 교토역 앞 스타벅스에서 토시상을 만났다. 복잡한 아침 역사를 이리저리 통과해 서부로 향하는 JR 산인본선에 오르자 학생들과 통근객들로 꽉 차 버린 차내는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겨우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은 니조二条를 지나 엔마치역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제가 사는 역입니다. 저기 저 너머에 우리 집 옥상이... 보이려나."
들뜬 목소리다. 평소에는 자전거만 타고 다니시는 토시상에게 이렇게 전차에서 바라보는 동네 풍경은 색다른 것이었을까.
"곧 우즈마사太秦역을 지나칩니다. 교토 사람이 아니라면 '우즈마사'같은 지역명은 읽기 어려울 거예요. 현대 일본어로는 도통 추측하기도 힘든 독음이니까요. 사실 이런 이름들은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관련 있는 곳에 붙어 있답니다."
도래인들의 이야기로 학부시절 배웠던 짧은 지식을 몇 마디 풀고 있는 동안 열차 밖 풍경은 어느새 울긋불긋하게 변해간다. 가츠라가와를 건너 아라시야마의 북쪽 기슭에 난 터널로 들어간 열차는 곧 계곡의 한가운데로 빠져나왔다. 다리 위에 세워진 독특한 역, 호즈쿄역이다.
우리를 내려놓고 반대편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전차의 굉음이 계곡에 드리워진 교각 너머로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바람과 물과 나무들의 소리만이 오가는 계곡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그 갑작스러운 고요함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뭔가 하나 마시고 시작합시다."
어느새 근처 자동판매기에서 뽑아온 주스를 내미는 토시상. 뚜껑을 따기도 전에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 등을 좇아 나도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산행에 어울릴만한 복장은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청바지에 늘 입던 니트 재킷을 걸친 차림새지만, 신발만큼은 편한 운동화를 골라 신고 왔다. 오래 걷는 것은 자신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게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카미상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바쁜 시기는 아니라지만 세 사람이나 동시에 일을 쉬는 것은 곤란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은 아버지와 단둘이 함께 하는 날이 되겠군요."
전부터 여관의 여주인을 내 어머니 역할로 빗대시더니 오늘은 스스로를 아버지라 칭하며 장난스레 웃어 보이신다. 진지한 표정으로 내뱉는 농담 속에 섬세한 애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방인 청년을 위해 귀한 휴일을 내어 고향의 좋은 곳으로 데려와 주시는 순수한 마음을.
"여기서 잠깐 이쪽으로 내려가 봅시다."
절벽 아래로 엉성하게 짜인 계단을 내려서자 허름한 가건물이 나타났다. 다리로 이어진 건너편 기슭에 토록코 호즈쿄역이라는 패널이 눈에 띈다. 계곡을 사이로 이쪽은 아타고야마, 저쪽은 아라시야마인 것이다.
다리 한가운데까지 성큼성큼 가로지른 토시상이 말없이 손가락을 들고 이쪽을 돌아본다. 그 손가락은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를 더듬더니 상류 쪽의 굽이진 곳을 향했다.
"조금 기다려 보면 재미있는 게 나타날 겁니다."
천삼백 년의 역사를 흘러온 호즈가와保津川의 뱃놀이. 그 조각배가 지나가는 물길이 바로 이 아래라는 이야기였다.
토시 상의 말을 믿고 새파랗게 식은 강물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기다렸건만, 기대했던 배는 나타날 줄 모르는데.
단념하고 발길을 돌릴까 하던 찰나 어디선가 오르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붉은빛으로 단장한 토록코 열차가 계곡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타고 내리는 사람도 거의 없이, 그저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라는 듯 머물러 있던 열차는 계곡 깊은 곳의 정적 속에서 영원히 멈춰있는 듯싶었지만 이윽고 울리기 시작한 발차 벨소리에 맞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 호즈가와의 푸른 물소리. 그리고 그 잔잔함을 꼭 닮은 고운 벨소리가 온 계곡을 메운다. 열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그 맑은 풍경에 홀린 나는 한참을 떠날 수 없었다. 소박한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이런 모습이다. 받아들이려 애쓰지 않아도 가만히 들어와 자리를 잡는, 그런 것이다.
"조금 더 쌀쌀해지면 미즈오水尾의 유자탕柚子風呂에 가 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갈림길까지 왔을 때, 토시상이 먼 쪽을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아타고야마의 특산품인 유자는 제주도의 귤 마냥 현지에서는 너무나도 흔해빠진 과일인 모양이다. 온천물에 아낌없이 던져진 유자와 함께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는 상상을 해 본다.
"이쯤인 것 같은데... 매년 오는 곳이지만 헷갈린단 말이지. 산이란 놈은 금방 모습이 변한다니까."
혼자 중얼거리시는 토시상. 무언가를 찾고 계신 것일까.
"아, 저기네요. 저 아래로 내려가서 점심을 먹읍시다."
길을 벗어나 내려간 곳은 오전 내내 내리쬔 햇살이 따듯하게 데워 놓은 돌밭이었다.
"호즈쿄쪽엔 혼자서 하이킹 올 때도 많은데, 언제나 여기서 도시락을 먹죠. 볕이 적당히 따듯하고 강물도 내려다 보이고 해서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토시상을 따라서 나도 큼직한 바위를 하나 골라 걸터앉았다. 그러자 무릎 위에 털썩 종이 꾸러미가 하나 올려졌다. 토시상의 수제 도시락. 료칸으로 출근하실 때에도 가끔 직접 만든 오니기리를 싸 와서 나눠주시곤 했었다. 그 속 재료란 것이 보통 뱅어 찐 것 아니면 차조기 말린 것을 넣어 만든 맛이며 색깔이며 교토스러운 것이었는데. 오늘은 곁들인 반찬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오니기리의 속은 미역에 우메보시만 찔러 넣은 소박한 것이었다.
"사실 제일 자신 있는 요리는 가라아게랍니다. 료칸 삼 주년 파티 때 잔뜩 튀겨 갈 테니 기대해도 좋습니다."
점심을 반쯤 비웠을 때 강물을 따라 뱃머리가 나타났다. 아까 보지 못했던 호즈가와 뱃놀이 배였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산중에서 먹는 도시락. 한가롭게 흘러가는 이국의 정취.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차갑게 식혀온 호지차로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발걸음을 뗐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짧은 터널을 통과한 길목에서 냇물 위로 붉은 난간이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토시상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그렇게 기슭까지 가시는 겁니까?"
자전거를 끌고 내려가는 등산객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토시상. 가만히 오가는 교토 사투리가 정겹게 들린다. 그들과 잠시 따로 떨어져 홀로 걷고 있을 때,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여행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늘상 생각에 잠겨 혼자서만 걷던 교토의 길들. 그러나 오늘의 여행은 끊임없는 대화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 혼자 걷는 길과 함께 걷는 길은 이렇게나 다른 종류의 여행이었을까. 삼나무 터널을 되돌아 나오는 젊은 부부가 길을 잘못 들었다면서 티격을 벌이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언쟁은 높아져도 두 사람은 길은 같은 방향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이 괜히 부럽게 느껴진다.
"이제 저 터널만 지나면 거의 다 온 겁니다. 옛날에는 단선 철로였던 길이라 폭이 좁아요. 양 쪽에 신호등을 달아놓고 차들이 번갈아 지나다니게 되어 있죠. 신호등은 자동차용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냥 곁길로 걸어가면 됩니다."
키요타키 터널 안에서는 흥분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오백 미터는 넘을 긴 터널 속을 도보로 통과하는 흔치 않은 경험. 좁은 길폭 탓에 앞뒤에서 차가 올 때면 벽으로 바싹 붙어야 했고, 벽면에 수백 번 수천번 반사되어 울리며 다가오는 자동차의 굉음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압박감이었다.
이렇게 가슴이 뛰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것, 아직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 세상에는 이토록 남아있던 것이다.
멀리 출구가 보였을 때는 이미 차를 여러 대 보내고 난 뒤였고, 벽에 너무 붙어 걸었던 나는 손바닥은 물론 몸에 걸친 모든 것이 새까매졌음을 알아챘다. 토시상은 그저 웃으셨고, 나도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안도감과 함께 나를 맞아 준 붉은 토리이. 웬일인지 돌아왔다는 기분이다. 터널 안에서 바싹 다가왔던 모든 감정이 다시 멀고 고요해졌다. 여기부터는 내게도 익숙한 아라시야마다.
"아라시야마에서도 단풍이 제일 아름다운 곳에 한 곳 들렀다 갑시다."
죠쟉코지常寂光寺의 단풍은 토시상이 꼽는 교토의 가을 풍경 중에서도 으뜸이란다. 길거리에서 파는 고로케를 하나 내 손에 들리시더니 입장 티켓까지 사 주시는 토시상. 오늘은 정말 양아들이라도 된 기분이다.
"아직 많이 물들진 않았네요. 게다가 올해는 단풍 색도 영 시원치 않습니다. 작년에는 굉장했었는데 말이죠."
사십 도를 넘나드는 분지의 볕은 여름 내내 단풍의 속살을 불같이 태워놓는다. 그러나 올해는 찬바람이 너무 일찍 불어온 탓에 그 붉은 얼굴들이 채 드러나기도 전에 낙엽이 지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완성해 나간다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오랜 시간에 걸쳐 차근히 준비했던 일들도 때로는 최선의 결과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그 속에 불같은 심지를 지녔었다 할지라도.
"오늘 미즈오 온천에는 못 갔지만 대신 아리스가와의 목욕탕에라도 들렀다 가는 게 어떨까요?"
토시상 자택 근처의 센토에서 이 날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노천탕에 앉아 해가 떨어질 때까지 긴 대화를 나누었던 걸로 기억한다.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오늘 걸었던 길들에 대해서. 이제껏 걸어왔던 길들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돌이켜보면 교토에서의 여행은 늘 길 위에 있었다. 청수사로 향하는 니넨자카 산넨자카. 매일 산책하는 가모가와 강변. 행여 마이코들를 볼 수 있을까 서성였던 미야가와의 돌다다미길. 비가 지나가던 날이면 기온 상점가 지붕 아래에서 한참을 헤맸었고, 눈부신 팔월의 어느 날에는 교엔 자갈길 위로 난 자전거 궤적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던 적도 있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교토의 길모퉁이들. 모두 내 소중한 여행의 한 장면들이다.
집으로 가는 길. 어둠이 깔린 아리스가와 역. 기온으로 향하는 노면전차를 기다리며 내일 걷게 될 길을 기대한다. 낯선 길을 일상으로 만들어 나가는 내 여행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