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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Jan 08. 2017

사월 잠실에서


칠십 년대부터 시작된 건설 붐을 타고 서울 한강변에 만들어졌던 우리 동네는 모두 합해 백개 동이 넘어가는 아파트들로 이루어진 콘크리트의 숲이었다. 내 어린 시절 팔십 년대 중반부터 구십 년대 후반까지, 서울 사람들의 주거 형태는 한옥 같은 구세대의 것들과 더불어 이른바 집장사 집이라 불리던 양옥집, 그리고 오층 이하로 계획된 서민형 아파트 단지, 마지막으로 새롭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맨션형 아파트가 공존하는 시기였다. 아직 서울 시내에도 많이 남아있던 논밭들이나 공지를 최대한 활용해 단숨에 많은 아파트들이 세워졌었는데, 건축 기술의 한계, 혹은 앞으로 이어질 폭발적인 자가용 수요를 예측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그 시기 동안 지어진 아파트들은 많은 경우 지하 주차장이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신 지상에 마련된 주차용 부지 덕분에 동과 동 사이의 간격이 매우 넓었었고, 그 덕분에 부지 전체에는 늘 굉장히 한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강을 거쳐 집으로 향하던 하굣길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장면들은 대부분 이런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투박하지는 않지만 완벽하게 정형화되지도 못한, 같은 아파트인데도 동마다 어쩐지 조금씩 다른 느낌의 건물들. 계단의 단차가 조금씩 달랐고, 현관의 넓이, 심지어는 천장의 높이나 베란다의 구조까지 조금씩 달랐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건물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특히 아파트 단지마다 한 두 개씩 지어졌던 상가 건물을 좋아한다.




수 없이 많은 발자국들과 기나긴 세월이 지나다닌 삶의 터전. 팔십 년대 주류였던 이런 건물들의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향수만이 아니다. 다시 재현해 내는 것도 기술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인간 사회의 구조상 앞으로의 역사에서 다시는 반복될 일이 없을, 그런 종류의 것들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이 떠오른다고 해야 할까.



이제는 아무도 앉지 않을 벤치와 옛날 스타일의 보도블록들만이 그 시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일층에 있었던 작은 서점과 당시엔 보기 힘든 수입 상품들을 팔았던 선물의 집, 그리고 지하층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던 넓디넓은 슈퍼마켓. 그리고 그 독특한 공기 냄새. 어린 시절의 나에겐 모험의 세계와도 같았던 이곳도 이젠 그저 재건축을 기다리는 낡은 건물이다.



해마다 봄이면 옛 동네를 찾아간다. 한가로이 추억을 더듬으며 봄 햇살을 만끽하는 것은 내겐 새 계절을 맞이하는 일종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내 추억의 상당 부분은 이미 부서져 새것들로 채워져 버렸고, 남은 것들도 곧 그렇게 될 운명이기에.



빛바랜 추억을 자꾸 들추어보고 싶은 버릇은 현재 혹은 미래에서 어떠한 즐거움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확실한 것은 이 옛 풍경들이야말로 내가 또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도무지 눈길을 둘만한 곳이 없는 도회지의 삭막한 풍경 어딘가에는 이렇게 숨어있는 나만의 추억의 샘물이 존재하고 있다. 내게는 한강변의 아파트 단지가 그런 곳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나도 모르는 그만의 오아시스가 존재할 것이리라.

 


그런 생각을 간직하고 있다면 날로 탁해지는 이 시대에서 버티고 살아남는 것도 나름 할만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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