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교토 맑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호 Mar 13. 2016

아름답게 낡은

금각 그리고 오층탑


교토의 상징을 들자면 무엇이 있을까.

천년 고도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역사적 명소도 여럿 존재하는 곳이지만

교토를 방문한 관광객들, 특히 나와 같은 초심자들이 찾는 명소를 꼽자면 키요미즈데라가 첫째로 있겠고, 그다음쯤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다.

금각사.

이름마저 금빛으로 빛나는 鹿苑寺로쿠온지의 금각.

그러나 나는 이 아름다운 건물에 솔직한 찬사를 보내기가 어쩐지 꺼려진다. 몇 번을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정이 안 간다고 해야 할까. 비유를 통하자면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 같은 느낌. 그 한나절이 채 못 가고 무너져 내릴 거짓말 같은, 그런 께름칙함이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이다.

저 누각이 본래 가졌을 은은한 빛이 분명 있을 텐데.

도금이라는 화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불타버리고 새롭게 세워진 숭례문처럼, 지금의 금각도 같은 운명을 겪은 레플리카다.


금각은 일본의 유미적 관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미술품일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안티크 마켓이 서는 날인데, 같이 가볼래요? 오늘 체크인하는 손님들도 전부 데리고 자전거로 갈 거예요. 이번 개최지는 東寺토지."


교토 시내 곳곳을 돌며 열리는 골동품 시장이 이번에는 토지에서 열리는 모양이다. 자전거라니. 언제 마지막으로 타 봤더라. 아마 고등학교 시절이었을까.


"아침 일찍부터 열리는 건가요? 그럼 먼저들 가 계세요. 전 천천히 합류할게요."


"편하실 대로."


사실 익숙하지 않은 자전거를 타고 그들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혼자서 느지막이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다리는 튼튼하니 걸어서 가 볼까. 날씨도 맑을 테니.

집에서 교토역까지 걷자면 삼십 분. 그리고 목적지인 토지까지 또다시 이십 분 정도 걸릴 것이다.

교토의 살인적인 더위가 유일한 문제겠지. 문자 그대로 살인적인 더위.  

사십 도에 육박하는 한낮의 열기 속을 한 시간이나 걷는다는 것은 체력을 대단히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쩐지 난 교토의 여름을 매일같이 걷고 또 걷고 있는데...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이국땅을 이렇게 걸어볼 수 있을까, 그런 줏대 없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다. 그저 발길이 가는 대로 떠돌아다닐 뿐.  

교토에서의 내 정체는 여행자라기보다는 방랑자에 가깝다.



멀리 오층탑이 보인다


예상대로의 더운 날이었다.

열 시가 넘은 늦은 아침 홀로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 대충 아침을 때우고선 집을 나섰다.  

이제는 로밍이 끝나 집 밖에선 GPS용도가 고작인 아이폰과 물 한 병을 손에 들고. 귀에는 이어폰을 낀 채. 그렇게 반쯤 관광객인 척 반쯤 현지인인 척.

조금 서글퍼질 만큼 오래 걷다 보니 멀리 토지의 오층탑이 눈에 들어온다.






로쿠온지와는 사뭇 다른 아담한 규모의 절간.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평범한 관광객인 나는 그저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댈 뿐이다.

그런 나를 위해 변명을 하나 하자면, 비록 깊이가 부족한 이미지만을 수용할지언정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동은 아낌없이 느끼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좋은 것을 느끼는 데에 분석이란 필요치 않은 도구 아닌가.

이날 본 토지의 오층탑이 내가 교토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어떠한 이성적 분석의 개입도 없었을 게 분명하니.



東寺토지의 五重塔고쥬노토



금각의 화려함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예쁘지 않고 곱다고 한다면 제대로 표현한 것일지 모르겠다.

이 건물도 금각처럼 인간의 손길이 닿은  인공적인 구조물임에는 틀림없다. 시대를 거치며 수 차례 손질이 가해져 현재의 것은 1644년에 재건된 것. 온전히 옛 것이 아닌 터이다.

그럼에도 그에게선 어쩐지 천이백 년 전의 아득한 영혼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날의 목적이었던 안티크 마켓에서는 내 눈길을 끌 만한 물건을 전혀 발견하지 못 했지만

이 탑이야말로 오늘 내가 찾아낸 교토의 골동품. 교토의 상징이리라.



압도적인 규모임에도 배경을 전혀 해치지 않는다


탑을 돌며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시장이 열린 쪽으로 되돌아 걸어갔다.


'안내는 해줄 생각 없어요. 나도 둘러볼 게 많으니까. 천을 좀 사야겠어. 오래된 기모노를 구해서 커튼으로 만들 생각이거든. 元禄겐로쿠 모양이면 딱 좋겠는데... 좋은 것을 찾길 기도해 줘요. 일단 도착하면 손님들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 없으니까 익호 군도 스스로 알아서 둘러보고요. 물론 돌아오는 것도 각자!'


어젯밤 기운 넘치던 여주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여인이다.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자전거를 쌩쌩 달리는 그녀는...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필시 강인할 테지.

이 희미하기만 한 이국의 청년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웬 패기 없는 놈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으려나.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이 여주인의 인생에도 많은 드라마가 있었으리라. 미국 생활이 길었고, 한번 이혼한 몸이기도 하다. 영국에서도 잠깐 살았었단다. 그 후 수십 년의 세무사로서의 커리어를 버리고 어쩐지 홀로 귀국했다.

미야자키 출신의 강인한 시골 여성으로 자랐지만 그렇게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지금은 교토에서 소박하고 아리따운 여관을 운영 중이다. 언제나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염색도 하지 않았다. 가끔 입는 나팔꽃 무늬 유카타만이 그녀의 유일한 멋 같아 보인다.


어쩌면 그녀는 금각이 아닌 오층탑을 닮은 아름다움을 갖추며 늙어가는 중이겠지.


한동안 시장을 둘러보며 소음 속에서 생각을 따라다니다

낡은 탑의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일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