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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Nov 18. 2019

다시 칠 수 있을까, 피아노

할아버지의 마지막 유품과 나


이사를 한 주 앞둔 주말 오후. 차가운 베란다 바닥을 맨발로 들락거리며 내 키를 훌쩍 넘게 쌓인 박스들과 씨름하는 중이었다. 오늘에야말로 정리해놓지 않으면 새집에서도 그대로 창고에 처박혀 다음번 이사 때까지 빛을 보지 못할게 뻔한 짐 더미들. 이제는 이 집에서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을 만큼 오래 묵은 구닥다리들 사이에서 혹시 건질 만한 것이 있는지, 더 정확하게는 버려서는 안 될 것이 과연 남아있는지 하나씩 들춰보는 작업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고 있다.


추억의 끝자락을 더듬어서야 떠오를 만큼 오래된 유물들이 하나 둘 튀어나올 때마다 멈추어서 감상에 빠지기를 벌써 수차례, 과연 오늘 내로 이것들을 끝장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떠오를 무렵 저 구석편에서 아담한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얼기설기 닫아놓은 다른 박스들 사이에서 테이프가 꼼꼼하게도 발린 모양새는 눈길을 단박에 끌었고, 나는 한숨 돌릴 겸 그것을 그대로 들고 거실로 들어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묵직한 상자에 둘둘 감긴 테이프는 겉으로는 튼튼해 보였지만 도구를 꺼내올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지내온 세월에 반쯤 삭아있었는지 손으로도 쉽게 떨어졌다. 


악보였다. 할아버지의 옛 악보들이다. 

그의 유학시절 교재로 썼을 까마득한 시대의 일본제 악보들이야 그동안 대부분 처분하거나 잃어버려서 이제는 분명 딱 한 권만 남아 거실 책장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테다. 이것들은 척 보기에도 그것들과 같은 시대의 물건은 아니었다. 나는 몇 권을 꺼내 표지 뒷면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칠십 년대 중반 국내에서 출간된 것들이었다. 그 시기라면 할아버지가 교수직에서 은퇴 후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피아노를 가르치실 때 쓰던 악보일 것이다.


바흐 클라비어 작품 전집과 슈만 소나타, 리스트 에튀드... 본디 흰색이었겠으나 이제는 갈색이 다 되어 바스러져가는 그 겉표지들에는 한자가 섞인 옛 시대의 철자가 줄줄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 둘 훑어 읽어 내려가며 거의 스무 권쯤 되는 악보를 꺼내놓자 맨 아래쪽에서는 조금 더 늦은 시대의 것들로 보이는 컬러 표지 악보들이 나왔다. 눈에 익숙한 노랗고 빨갛고 파란 그 악보들은 내가 어릴 때 잠시 동안 피아노를 배우던 때 쓰던 바이엘, 체르니, 그리고 하농과 같은 초급용 연습곡집이었다. 먼지와 곰팡이와 빛바랜 종이 냄새에 둘러싸인 나는 그것들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어릴 적 살던 집에는 방마다 피아노가 한 대씩 있었다. 


이렇게 운을 떼면 내가 꼭 부잣집에서 나고 자랐다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 집은 부유하지는 않았다. 내 어릴 때 살던 집은 현관을 열면 내부 구조가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손바닥만 한 아파트였으니까. 그래도 방마다 피아노가 한 대씩 있었다는 이야기가 순전히 거짓말은 아닌데,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거실에 한 대, 작은 방에 한 대. 도합 두 대의 피아노를 놓고 살았으니 방마다 피아노가 한 대씩은 있었던 셈이 아닌가.


한길 건너에 살던 이모네 집에도 비슷한 종류의 피아노가 역시 한두 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들은 모두 할아버지가 피아노 교실을 위해 마련한 것들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엔 할아버지는 이미 중풍으로 한 차례 쓰러지신 뒤라 그가 피아노를 가르치는 모습을 목격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쇠약해지신 뒤론 아무도 치는 이 없이 방치되기 시작한 검은 빛깔의 피아노들은 내가 처음 건반을 두드려보기 시작했을 두세 살 즈음엔 이미 여기저기 망가져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를 내는 악기로서의 역할만을 따지자면 우리 집 피아노들은 그대로도 여전히 쓸만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나오는 피아노와는 조금 다른, 더욱 맑고 퍼지는 음색을 내던 그 악기들의 소리는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팔십 년대 후반은 아직 한국에서 피아노 붐이 수그러들지 않은 시기였다. 아마도 개신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불어나기 시작했을 피아노 학원은 전국의 주택 계획과 맞물려 아파트 상가 한 동 건너 하나씩은 꼭 자리 잡게 되었고, 수년쯤 지나 가정용 컴퓨터라는 시대의 명물이 대대적으로 보급되기 이전까지는 아이들 방에 놓인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야말로 나름 성공한 중산층 가정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 집은 윤택한 중산층 가정의 축에는 끼지 못했지만 어쨌든 피아노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런 집에서 자라나 갓 취학한 국민학생이 유행을 따라 피아노를 안 배우게 될 리가 없었다. 내가 제일 처음 다녔던 학원은 호산나 피아노 학원, 두 번째는 유리 피아노 학원이라는 곳이었는데 두 군데 모두 지역 교회의 사모님이 경영하는 곳이었다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 안 일이다.


학원을 다닌 짧은 기간 동안 나간 진도만을 따져보자면 소질이 아예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내 피아노 학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혹독하게 아이들을 다그치는 방법으로 가르치는 몇몇 선생님들에게 늘 주눅이 들어있었고, 그렇잖아도 악기든 뭐든 진득하게 흥미를 붙이기엔 아직 어렸던 내게 늘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던 학원은 정을 붙이기 영 쉽지 않은 곳이었다. 방과 후 치러야 하는 피아노 학원 레슨은 죽도록 싫은 일과였으며, 어머니의 재촉에 밀려 억지로 등원해서 피아노 앞에 앉아본들 연주에 재미를 느끼기는커녕 겨우 겨우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집에서도 피아노는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그렇게 다음 레슨에서 연습 부족을 지적받으며 또다시 혼나는 날의 연속이었다. 


내 담당 선생님은 늘 틀린 음을 짚은 내 손가락을 치켜들고는 올바른 음을 연타하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도잖아! 도! 도도도도! 도! 


그렇게 또다시 주눅이 들고, 의욕은 나날이 떨어지고... 도저히 견디다 못한 어린 시절의 나는 어느 날 드디어 학원을 빼먹고 바깥으로 싸돌아다니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 며칠간은 그런대로 자유를 만끽하며 돌아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주머니에 용돈 한 푼 없었던 국민학교 저학년짜리가 방과 후 집 밖에서 몇 시간씩 버틸만한 거리는 애초에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놀이터에서 처음 보는 아이들 틈에 껴 모래장난을 하며 시간을 때우다가 그들이 하나 둘 집으로 학원으로 흩어지고 나면 홀로 남아 멍하니 그네를 밀거나 할 뿐. 놀이터를 둘러싼 기와지붕 모양의 얕은 담장 위를 아슬아슬 걸어 다니며 놀던 기억도 난다. 아파트 입구마다 빼곡하게 붙은 전단지와 몇 세대를 거쳐온 역사가 느껴지는 비루한 낙서들을 짚어가며 구경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조차 다 질리고 말았다면 남은 일이라곤 미로 같은 아파트 단지를 하염없이 헤매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린아이가 혼자서 고립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 조금만 오래 눈에 띄어도 그만 놀고 집에 가라며 베란다 너머로 말을 건네는 아주머니가 동네 어디에나 한 명쯤 있는, 그런 시대였으니까.


그렇게 며칠을 더 보내고 났을 때 문득 어린 내 안에서는 이게 혹시 착한 아이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학원으로 돌아가 봤자 선생님께 한층 더 호되게 혼날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마침내 겁을 집어먹었을 테고. 사실 충분히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난 수줍음 많고 소심한 사내아이였으니까.


마음을 굳게 먹고 학원 문 앞까지 가서 한참을 망설이다 돌아섰던 날, 눈 딱 감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뭐라 뭐라고 시답잖은 변명이라도 주절거려 볼까? 지금일까? 아니야, 그럼 지금일까? 그렇게 머릿속으로 잔뜩 생각만 굴리다 돌아섰던 날, 추운 계단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누군가 내 존재를 눈치채고 데리고 들어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 품다 돌아섰던 날... 죄악감으로 가득 찼던 그 몇 주 동안의 불편한 기억은 아직도 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얇은 나무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밝은 조명과 요란한 피아노 소리로 가득한 학원 내부와, 나 홀로 서 있는 어두침침하고 고요한 상가 복도는 그렇게 하루하루 서로 동떨어진 세계로 멀어져 갔다.


집에는 오랜 시간 들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이었겠지만, 가슴 졸이는 작은 죄인에겐 그조차도 영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밤낮으로 신경이 곤두서서는 울려오는 전화벨 소리를 두려워했고, 걸려온 전화마다 어떻게든 먼저 받으려 히스테리를 부리던 기억이 난다. 전화가 올 곳이라고는 당최 없을 국민학교 저학년짜리의 이상한 행동을 가족들은 얼마나 수상히 여겼을까. 그리고 설령 전화를 먼저 받는다고 한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었을까.


영원한 비밀은 물론 없었다. 심상치 않은 긴 결석을 눈치챈 학원의 누군가가 드디어 전화를 걸어왔고, 일이라는 게 늘 그렇게 돌아가듯 안타깝게도 어머니가 그 전화를 받았다. 당시엔 상당히 엄격했던 어머니는 나를 크게 한 번 혼낸 뒤 스스로 학원을 계속 나갈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게 했다. 나는 물론, 후자를 선택했다.


내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던 짧고도 유일한 경험은 그렇게 해서 막을 내렸다. 학원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피아노는 이미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고. 정이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일하게 오가던 내 손길마저 끊긴 우리 집의 피아노들은 그렇게 뚜껑조차 열리는 일 없이 방치되기를 몇 년, 어머니가 내게 다시 칠 것인지 여부를 수차례에 걸쳐 물으시는 것을 건성으로 대답해 넘기던 어느 날 드디어 무언가 결심하신 듯 업자를 불러 처분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몇 푼을 내 손을 이끌고 우성원이라는 곳에 가 전부 기부하셨다. 피아노를 팔 당시엔 나도 이미 중학교에 진학한 뒤라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억지로 철이 들락 말락 하는 시기였고, 한 푼이 아쉬웠을 살림을 꾸리던 어머니의 그러한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유품에 대한 어머니의 마지막 존경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


내가 처음 피아노를 배우고 곧바로 관둔 그 해에 할아버지는 집에서 잠드시듯 돌아가셨다. 그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딱 한번 피아노를 연주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병마 탓에 이미 두 손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아 아주 천천히, 음 하나하나를 짚어가는 힘겨운 연주였다. 그때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는 손자의 소식을 듣고 직접 무엇인가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라도 드셨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삶의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당신의 평생을 바쳤던 피아노를 다시 한번 쳐보고 싶으셨던 것일까. 누군가의 마음속을 헤아리기란 지금도 어려운 일이지만, 사소한 눈치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 어렸던 나는 그저 옆에 서서 할아버지가 왜 빨리 다음 음을 치지 않나 의아해하며 재촉하기만 했을 뿐이다. 


악보 사이에 할아버지의 자필 가곡집이 한 권 섞여있었다. 근화사라는 제목이 붙은 그 가곡집은 해방 직후 1947년 서울음악연구회 라는 곳을 통해 출판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 사이에서 할아버지의 옛 사진을 한 장 발견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그. 피아노에 가지런히 놓인 두 손이 지금 내 손과도 닮은 구석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어쩌면 할아버지를 통해 나로 이어질 수 있었을 피아노. 어린 내겐 그를 이어받을만한 재능이란 게 있었을까. 혹 있었다고 한들, 지금은 이미 빛이 바래 시들어버렸을까. 마치 오늘 찾아낸 할아버지의 악보들처럼. 


이사를 한 주 앞두고 있다. 이 기회에 많은 것을 비우리라 마음먹은 참이다. 가구들도 대부분 처분을 예약해두었고, 오늘 정리하는 베란다의 잡동사니가 거의 막바지 작업이다. 살아오면서 쌓인 구닥다리들을 정리한다고 해서 인생에 어떤 큰 여유나 해방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어쩌면, 이사 가는 새 집 한편에 싸구려 디지털 피아노 한 대 놓을 정도의 여유는 생길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자취를 좇을 만큼의 재능은 이미 내게선 찾아낼 수 없을지 몰라도, 그가 남긴 가곡집에 담긴 곡들을 연주해낼 만큼의 가능성은 남아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할아버지의 유품을 다시 상자에 잘 담아 거실 한 구석에 밀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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