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호 Aug 10. 2020

디지털피아노는 피아노의 모조품에 불과할까?

디지털피아노가 아무리 좋아져 봤자 절대로 피아노를 대체할 수 없어.


피아노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보거나 혹은 직접 떠올렸을 법한 말이다. 피아노 전공자 외에도 국내외 여러 피아노 지도자, 애호가는 물론이고, 취미생들까지도 자주 한탄 섞어 내뱉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그중 혹자는 디지털피아노를 연습용 보조 악기로서조차 아주 쓸모없는 물건으로 치부하며, 제대로 된 연주가가 되려면 반드시 어쿠스틱 피아노에서 연습해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피력하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당하신 말씀이다. '피아노'라는 악기는 목제 건반과 프레임, 그리고 금속제 울림판과 스트링으로 마련된 것만을 지칭하는 말이기에,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피아노'로 연습하는 것 이외에 더 나은 방법이 존재할 리 없다.  


그러나 이것은 디지털피아노가 그저 피아노를 모방해서 만들었을 뿐인 '모조품 피아노'라는 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피아노는 비록 처음에는 피아노를 모방해 만든 간이 악기로서 탄생했을지 몰라도, 현시대에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악기로 탈바꿈하고 있으니까.


'디지털피아노'라는 이름이 붙은 이 현대의 악기는 태어난 지 오십 년이 채 안 되는 역사가 짧은 물건으로, 전자악기 메이커인 롤랜드 사에서 1970년대에 중반에 시장에 내놓기 시작한 악기이다. 이것이 개량을 거듭해 일반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이후로, 그조차도 초창기에는 88개의 건반을 갖췄다는 점만 빼자면 이른바 '전자키보드'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물건이었다. 해머가 없는 스프링 건반을 탑재하였기에 당연히 강약 조절은 불가능했으며, 꽤 근래에 제작된 디지털 피아노에서도 이러한 건반의 무게와 강약 터치는 적용되지 않은 모델은 많은 편. 아마 이러한 조잡한 모델을 접했던 사람들이 디지털 피아노가 표현력이 전무하다는 오해를 갖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 이미지가 그대로 굳어진 게 아닐까 싶다. 심지어 '디지털피아노=전자키보드'로 구별 없이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 듯하고.


이러한 오해와 몰이해로 인해 이 현대의 악기를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은 종종

'디지털 피아노는 액션이 너무 가벼운 데다 누가 치든 간에 그랜드피아노의 예쁜 소리만 나. 그래서 피아노에서 가장 중요한 터치에 따른 음색 표현을 공부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타당한 의견이다. 

그러나 디지털피아노가 과연 표현력이 전무한 악기일까. 


여기서 우선 알아둬야 할 것은 피아노든 디지털피아노든 그 궁극적인 메커니즘은 똑같은 타건 악기이며, 따라서 일단 손가락이 건반을 누른 순간 음이 울리면 그 후에 그 음색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페달을 쓰는 경우는 제외). 즉, 피아노의 소리를 결정하는 요소는 1. 손가락으로 건반에 어느 정도의 속도(힘)를 가하느냐와 , 2. 그 손가락을 어느 정도의 속도(힘)로 떼느냐에 거의 대부분이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초보자의 삐걱대는 음색이든, 깊은 감동을 주는 거장의 연주든 간에, 이 두 가지 메커니즘의 수없이 많은 조합(그리고 조합과 조합 사이의 간격)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한 곡에 안에서 이 인풋과 아웃풋이 만들어내는 경우의 수라는 것이 실로 세기 어려울 만큼 많으며, 그중에서 우리가 흔히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경우의 수가 극도록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 (보통의 경우 체계적으로 정리된 조합 방식에서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초보자의 삐걱대는 연주를 아름답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각 음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너무 세게(빠르게) 혹은 약하게(느리게) 누르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이르게, 혹은 늦게 손가락을 떼는 조합이 그렇지 않고 정돈된 부분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디지털피아노에서는 과연 이런 현상(조화롭지 못한 인풋과 아웃풋)이 마법처럼 사라진다는 말인가? 그럴 리 없다. 그랜드피아노에서 삐그덕 대던 손가락이 디지털피아노를 치게 되었다고 갑자기 정돈되어 움직일 리는 없다는 이야기. 


아마 위와 같은 오해가 생긴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디지털피아노의 강약 표현이 초창기 모델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디지털피아노 제조사의 웬만한 중간 가격대 이상의 모델들은 보통 100단계 이상의 강약 센서를 갖추고 출시된다. 즉, 내가 실수로 세게(빠르게) 치거나 혹은 약하게(느리게) 떼거나 하는 손가락의 거의 모든 표현을 정교하게 잡아내어 어쿠스틱 피아노와 거의 차이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생각 외로 디지털피아노에 대해 여기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도 사실 많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디지털피아노에 대해 아쉬워하는 점은 남아있다. 바로 '터치의 차이'에 따른 음색의 변화. 즉, 제아무리 100단계로 강약 표현이 가능해 봤자 그것은 음량의 차이일 뿐, 실제로 ppp~fff까지의 터치에 따른 음색을 나타내지는 못한다는 주장. 


여기서 디지털피아노와 피아노를 비교할 때의 문제점을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바로 체급의 차이. 어째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스타인웨이나 뵈젠도르퍼와 같은 최고급 그랜드 피아노 모델과 기껏해야 백만 원, 이백만 원 남짓한 디지털 피아노를 비교하려 든다는 점. 악기든 무엇이든 정당한 비교를 위해서는 동등한 체급을, 만약 그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라면 가격대라도 최대한 비슷한 수준에서 맞춰야 공정한 법 아닌가. 현존하는 하이엔드급 디지털피아노의 가격대는 대략 4-500만 원대에서 형성되고 있는데, 이 모델들을 비슷한 가격대의 어쿠스틱 업라이트 피아노와 비교해보자면, 솔직한 의견으로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점이 없다고 본다. 오히려 언제나 정확한 피치를 유지한다는 점과(조율 등 관리가 필요 없음), 업라이트 형태지만 그랜드 피아노의 건반과 페달 모델도 선택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과 장소에 제약받지 않고 연주와 연습이 가능하다는 점 등등 장점이 훨씬 많은 편. 


그리고 무엇보다, 최신 기종에서는 바로 강약 표현을 음량의 차이가 아닌, 터치에 따른 음색 표현으로 구현하고 있는 모델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면, 디지털피아노 제조사에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샘플링(녹음 방식) 방식을 더욱 확장시켜, 각 셈여림마다 단계별로 샘플링한 음을 연주자의 터치에 맞춰 재생하는 방식을 쓰는 제조사도 있고, 아예 샘플링 방식을 버리고 완전한 컴퓨터의 조음 방식을 탑재하여 각 현끼리의 진동에 의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배음이나 간섭음을 재현해내는 모델, 또, 뚜껑의 열림이나 울림판의 조정 정도에 따른 이른바 임장감의 차이까지도 리얼하게 재현하는 모델을 제조하는 회사도 있다. 한편으로는 아예 업라이트 피아노와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제조법으로 만든 액션 및 해머와 향판(!)까지 그야말로 실제 피아노에서 뚝 떼어다가 그대로 박아 넣은 모델을 내놓는 제조사까지 존재한다. 


이러한 모델을 만져보고 나서도 실제 어쿠스틱 피아노와는 표현력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넌센스일 것이다. 아마 소리를 차단하고 건반 터치만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 본다면 제아무리 피아노를 수십 년 쳐 온 사람이라도 십중팔구 어떤 것이 디지털피아노인지 못 맞출 것이 분명하니까. 즉, 하이엔드급 디지털피아노와 실제 피아노와의 차이점은 이미 실제 피아노들끼리의 차이점만큼이나 좁혀졌다고 볼 수 있다.


피아노의 모조품으로 태어났지만, 이미 피아노가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가능하며, 그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갖춰가며 점점 더 발전하는 악기. 나는 이 디지털 피아노라는 악기의 포지션이 그 옛날 하프시코드가 대세였던 시절, 처음으로 발명된 포르테피아노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하프시코드의 절정기에 태어나 모던 피아노의 전신이 되었던 이 '포르테피아노'라는 악기는 당시 사람들의 입맛에는 차지 않는 조잡한 악기였으며, 위대한 바흐도 이 악기를 연주해 보고 '음색은 평범한 데다 고음역의 소리가 부족하고 액션은 무겁다'라고 혹평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대단히 칭찬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포르테피아노 애호가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수집품들 앞에서 한 말. 그 누가 칭찬을 안 할 수가 있었을까.) 바흐가 피아노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는 점은 그가 피아노를 위해서는 단 한쪽의 곡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당시의 포르테피아노가 바흐가 반할 만큼 훌륭한 악기였다면, 건반악기를 특별히 사랑했던 바흐가 그 새로운 악기를 위한 곡을 안 썼을 리 없으니까.


만약 바흐가 낭만시대 이후의 이른바 '모던 피아노'를 만났더라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분명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며, 아마도 피아노만을 위한 바흐의 곡이 작곡되어 현대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그만큼 그 시대 처음 등장했던 포르테피아노는 표현력도 부족하고, 조음 방식이 아예 다르므로 오르간 등의 건반악기 연주 연습에도 적합하지 않은, 그야말로 요상하고 조잡한 악기였던 것이다.


여기서 바흐나 당대 사람들이 포르테피아노에 대해 평가한 '음색은 평범, 고음역의 소리가 부족하고 액션이 무겁다'라는 구절은, 디지털피아노에 대한 현대인들의 푸념과 비슷하게 들리지 않는가?


현대의 디지털 피아노도 바로크 시대의 포르테피아노처럼 지금은 사람들에게 그저 취미생의 연습용 보조 악기, 혹은 연주자의 재미있는 장난감 정도로 치부되는 형편이지만, 앞으로 50년, 100년 뒤에는 어쩌면 스타인웨이 등의 명품 그랜드피아노를 모두 밀어내고 스테이지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떤 이는 전자제품 따위가 절대로 그렇게 될 리 없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세상 모든 발전과 흐름은 상식의 위를 걷지만은 않는 법. 도약은 고정관념을 깨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현재의 기술 발전 추이를 보면 불가능하기만 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당장, 혹은 가까운 미래에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므로, 디지털피아노는 아직까지는 피아노의 보조용 악기라는 포지션에 만족해야 할 것이지만.


나 역시 디지털피아노만으로 연습하는 데에는 한계를 느끼고 있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500만 원대를 호가하는 최고급 사양 모델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더더욱 그렇다. 전염병 등을 핑계로 실행을 미뤄 왔지만, 장마가 끝나면 가까운 연습실이나 하다못해 교회라도 찾아가서 실제 피아노를 만져볼 기회를 가져야 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흐 리딩 첫걸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