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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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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r 18. 2016

여우 신사

소중한 한 끼


어느새 낮잠에 들었었나 보다.

눈을 뜨자 창밖은 어슴푸레 저녁시간인 모양이다.  

고요한 집안. 이따금씩 저 멀리 공사현장의 기계음만이 들려온다. 투숙객들은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나 보다. 아마 다들 저녁 식사 메뉴라도 찾아 헤매고 있으려나. 모처럼 이국땅에 왔으니 소중한 한 끼를 망쳐버리지 않도록 많이들 고민하시고 잘 정하시기를.



한 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교토에 와서 생긴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매일매일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문제다. 일을 도와드리는 날에는 아침과 점심을 제공받지만, (그리고 하우스 룰에는 위반되지만 거의 항상 저녁식사 또한 신세 지고 있다.) 쉬는 날이면 그 두 끼나 세 끼를 온전히 혼자 해결해야 한다. 원래부터 홀로 밥 먹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나만 쓸 식재료를 사다 놓고 매일 따로 요리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기에 지금 내겐 외식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서 식사란 참 중요한 화젯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 가족을 왜 식구들이라고 하겠는가. 먹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지속적인 즐거움이기에. 

물론 그 이전에 식사란 곧 목숨과도 직결되는 행위이기도 할 테고.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어도 고요하기만 한 것을 보니 여주인도 외출 중인 모양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도 인기척은 없었다. 집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부엌 겸 오피스 겸 생활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방 앞으로 가 문을 따고 들어선다.


"타피."


불 꺼진 쪽방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여주인의 카푸치노색 고양이를 불러보았지만 기척이 없었다. 아마 자고 있을 것이다. 태평양을 건너 일본까지 온 할머니 고양이 타피. 그녀도 이제 슬슬 삶에 지쳐가는 중이겠지.


'차나 끓일까.'


따끈한 우롱차가 생각난다. 물을 올려놓고 냉장고 속에서 몇 년은 묵었을 것 같은 서호용정인지 하는 틴을 꺼냈다. 찻숟가락도 쓰지 않고 그대로 털털 주전자에 붓는다. 아마 이거, 내용물은 표지와 전혀 다른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


투명한 찻주전자가 노랗게 물들었을 때쯤 뒷문 밖에 매달아놓은 풍경이 두어 번 딸랑거린다. 중문을 열고 나가 돌바닥에 내려서서 뻑뻑한 미닫이문을 두 손으로 힘겹게 밀었다. 여주인이 자전거 자물쇠를 채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미안해요, 두 손에 짐이 한가득이라."

"이놈의 문짝도 말썽이네... 빨리 사람을 불러서 고쳐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무슨 차 끓였어요? 우롱차? 아 나도 좀, 괜찮을까?"


집 앞 언덕길 위에 있는 슈퍼마켓 로고가 인쇄된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최근 들어 이른바 성수기에 접어든 교토. 제대로 밥을 해 먹을 여유조차 없다. 사실 정말로 여유가 없다기보다는 순전히 오카미상의 그렇다는 의견에 압도당한 것이지만, 요 근래는 이렇게 저녁 타임 세일을 노려 도시락을 몇 개 사다 놓고 다음 날 전자레인지로 데운 것을 점심식사로 때우고 있다.


"이렇게 맛있는 도시락을 반값에 살 수 있다니. 정말 잘 됐지."


"네... 그렇죠."


교토에 와서 겨우 일주일 남짓이지만 이 여주인의 입맛만큼은 완벽하게 간파했다고 생각하는데. 기본적으로 그녀는 무엇을 입에 대든 맛있다 맛있다를 연발하는 타입.


"내가 좋아하는 후토마키도 있어서 사 왔지요. 미야자키에서 살던 때부터 제일 좋아하는 건데. 그리고 이건 당신 몫 이나리상."


한국의 김밥과 똑 닮은 후토마키라는 것과 함께 이나리상을 꺼내 보이는 그녀.


이나리상이란 다름아닌 유부를 입힌 초밥


이나리. 곡식의 신.

그것이 어떻게 유부초밥이라는 뜻을 품게 되었을까? 생각하자면 매우 흥미롭지만, 실상은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다. 예부터 이나리 신사에 바치는 공물 중에 유부가 있었다는 것. 이나리 신사의 영물인 여우와 유부와의 관계는 키츠네우동과 유부와의 관계랑 비슷한 맥락이겠지. 뭐, 더 깊이 파고들면 훨씬 흥미로운 전설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도 일본 전국에 있는 이나리 신사에서는 유부가 바쳐지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수백만 개의 유부가 아깝게 상해 가고 있을 그 이나리 신사들의 총본산이 바로 이곳, 교토에 있다.


伏見稲荷大社후시미이나리타이샤


이나리란 여우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보았다면 기억 속에 남았을 법한 바로 그곳.

붉은색 토리이들이 만든 터널이 어쩐지 스산하게 느껴지는 것은 종교적인 경외로움 때문일까.


일본의 신사라 하면 바로 이 붉은 토리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이나리 신사는 유명하고 일본 전토 곳곳에 있다. 곡식의 신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삶이란 어쩌면 먹고사는 것의 연속일 뿐이기에. 


잘 먹게 해 주세요.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굶지는 않게 해 주세요. 


태고로부터 인간이 바라 왔을 가장 원초적인 기원이 이것 말고 무엇이 있었을까. 물론 현대에는 많은 기업들과 개인들의 더 복잡하고 세련된 욕망들이 붉은 토리이에 새겨져 이 곳 후시미 회랑을 이루고 있지만.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 쌀 한톨의 소중함. 그런 것들은 이 포식의 시대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을 명제겠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지금도 매일 매일 식사에 대한 고민은 하고 있는 모양이다. 혼자 먹는 밥이 어떻다는 둥, 무병장수를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한다는 둥. 혹은 어떻게 하면 많이 먹고 덜 살찔 수 있는지에 대해서라도 말이다. 


나 또한 고민하고 있다. 오늘은 또 뭘 먹지 하며. 하지만 되도록이면 매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까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즐길까에 대해 고민하고 싶은데 말이야. 먹는다는 것은 삶을 잇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 그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선물 같은 즐거움을 오늘도 생생히 받아들이고 싶다. 삶의 어떤 장면에서든 살아감을 의식한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실제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순간순간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부자연스러운 노력이 조금은 필요한 법.


여주인이 사 갖고 온 유부초밥은 의미 있는 선물로 치기엔 너무나도 슈퍼마켓스러운 맛이었지만 말이다.

다음번에 후시미에 들를 일이 있으면 진짜 이나리상을 먹으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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