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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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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r 19. 2016

폭풍산

아라시야마 산책


장마가 지나간 교토의 여름 날씨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태풍이 오기 전 몇 주 동안은 맑고 더운 날씨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오늘처럼 일기예보에 구름 모양이라도 뜬 날에는 온종일 긴장해야 한다. 오전부터 비가 오는가 싶다가도 금세 푸른 하늘이 나타나질 않나, 맑은 하늘에 안심하고 세탁물을 널면 어느 새 후드득 떨어지질 않나. 매일같이 네댓 번씩은 세탁기를 돌려야 하는 숙박업 종사자들의 고된 어깨에 무겁게 젖은 빨래를 몇 번이나 더 얹어 주는 성가신 시기가 한동안 이어진다.


'차라리 종일 쏟아지는 게 낫겠어. 다 포기하고 빈 객실이나 하다못해 내 방에라도 널어놓고 건조기를 돌리면 될 테니까.' 


"미안해. 쉬고 있었어요?"


기세 좋은 노크가 두 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웃으며 들어오는 여주인. 양 손에는 세탁 바구니를 늘어뜨리고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창문을 연다. 내 방 창문을 통하지 않으면 이층 베란다로 나갈 수 없는 멋진 구조 덕택에 이렇게 쉬는 날에도 프라이버시를 반납해야 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개인 공간의 침범에는 익숙한 삶을 살았었고 따라서 이런 상황에는 그다지 예민하지 않을 나일 텐데도 약간 짜증이 생기기 시작하는 요즘.


"아... 어쩌면 또 비가 내리겠어요."


"어, 그러네요. 그래도 널 수 있을 만큼 널어놔야지. 아직 세탁할 게 산처럼 있으니까."

"시트만이라도 말라야 될 텐데... 수건이나 베갯잇도 여유가 없는 편이긴 하지만 이런 건 금방 마르니까 괜찮아요. 익호 군도 항상 시트부터 먼저 널어줬으면 좋겠어요. 그건 그렇고 이년 전에 비해 방마다 리넨 맞추기가 빠듯해졌어. 그만큼 장사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럼요. 최근 몇 주 동안은 공실이 있었던 적도 없는 걸요.


"조만간 같이 니토리에 보충용을 사러 가야겠네요."  


세탁기가 한 차례 일을 끝내는 사십오 분 간격에 맞춰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노크와 수다가 오늘 날씨를 보아하니 앞으로도 서너 차례는 이어질 듯하다. 

비를 무릅쓰더라도 나가는 게 좋겠어.


"어디 나가려고요?"


"네 좀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요."


"잘 생각했어. 집에 있어 봐야 뭐 해요. 좀 돌아다니고 그래야지.

어디까지 갈 생각이에요?"


"글쎄요, 나가면서 정하죠 뭐."


마츠바라 다리


그렇게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마츠바라 거리를 따라서 서쪽 비탈을 내려 카모가와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익숙한 발걸음을 옮긴다. 마츠바라 다리 아래로 비친 하늘 색을 보자니 오후엔 과연 한 차례 더 쏟아질 것도 같다. 우산은 가지고 나오지 않았지만 이런 더위라면 좀 젖더라도 괜찮을지 몰라.


타카세가와를 따라서 가와라마치역 방향으로 걸어 본다.   

어디로 갈까. 교토에 와서 줄곧 걸어만 다녔으니, 오늘은 전차를 좀 타 볼까. 연지색 한큐선을 타고 갈만한 장소가 한 군데 있긴 하다. 교토 서부의 아라시야마. 가벼운 산책치곤 좀 멀리 나가게 되겠네.



정오를 넘긴 시간이었지만 날씨 탓인지 역 주변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멀리 산봉우리들만이 시야를 온통 시원하게 뒤덮는다.



인기 있는 교외 관광지인 아라시야마를 이런 조용한 분위기에서 거닐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려나. 

어쩌면 흐린 날을 선택한 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에겐 좋은 경관을 홀로 차지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큰 사치.



교토에서의 생활도 벌써 몇 주나 지나가 버렸다.

이젠 새로운 곳에서의 신선함이 점차 익숙함으로 바뀌어 가는 중이다. 의식적으로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떠나오기 전, 내 힘이 닿지 않았던 많은 문제들에 직면했었다. 그런 것들은 그저 잠시 떨어져서 먼발치에 치워 두면 어느새 저절로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고 누군가 그랬었던가. 지금 돌이켜보면 많이 홀가분해진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문제의 원인이 내 안에서 비롯된 경우라면 그 문제란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끈질기게 쫓아오는 것 또한 분명히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애써 그것으로부터 벗어났다 하더라도 사람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또 다른 골칫거리란 생겨나는 법.


나는 어쩌면 이곳에서조차 또 도망치고 싶어 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적한 대나무 숲길.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기도 드문 일이라는 것은 나중에나 알게 되었다.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 같은 헤이안시대의 노랫말을 새긴 시비가 늘어서 있는 정원으로 어느새 흘러들어왔다. '오구라 백인 일수 문예원'에 딸린 정원 시설이라는 설명. 일본 시에 관한 거라곤 '기침을 해도 혼자'라는 하이쿠 같지 않은 하이쿠 한 수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 아름다운 정원도 내 발걸음을 오래 붙잡지는 못했다. 감수성이란 언제나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들과의 공명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법이니. 


故미소라 히바리 기념관


그것보단 이 건물이 훨씬 흥미롭게 느껴진다. 지금은 폐관된 시설이지만 미소라 히바리라는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생전부터 재일교포다 아니다 말도 많았지만 그런 것들은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그저 아름다운 목소리로 시대를 노래했던 그녀의 많은 곡들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아저씨 같은 취향을 가진 놈이 이젠 아예 교토로 떠났다며 선배 한 명은 나를 '미야코의 아저씨京都のおっさん' 라고까지 부르기 시작했지만, 뭐 어떤가. 좋지 않은가.


교토 아저씨의 입맛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제야 비가 내린다.

걷어올린 셔츠가 전부 젖어버렸지만, 아랑곳 않고 버스에 올랐다. 이 곳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함부로 쳐다보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한 무관심인지 혹은 배려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연약한 마음을 가진 종류의 사람들에게 편히 살아가기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뿐.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폭풍 같은 멋은 못 갖췄더라도, 잔잔히 비가 내리고 그치듯 애매하지만 수수한 교토의 날씨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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