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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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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r 20. 2016

우지강에 뜬 우키후네


분지의 여름 열기가 체력을 잔인하게 갉아먹고 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정신은 고양되어 가는 기분이다. 햇볕 탓일 것이다. 오랜 세월 완전히 연소되지 않고 쌓인 마음속 응어리들. 그 음습한 앙금들조차 자오선의 태양 아래에선 산산이 분해되고 마는 것이다. 묵은 시트를 소독하기 위해 해가 나길 기다리듯이, 그렇게 어느 해부턴가 나는 여름을 기다리며 산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한 달이 넘게 지내본 것은 난생처음이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어쨌든 지금은 한국을 떠나 있고 싶어. 이런 막연한 느낌만을 가지고 서둘러 왔을 뿐, 제대로 이 시기를 만끽하지 못하고 있는 나. 일상에서 벗어난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 잠시 동안의 들뜬 마음도 또 다른 일상을 마주해 버리자 어느새 다시 탈출로의 욕망을 가슴 한켠에 스며들게 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분간 떠날 수 있는 곳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란 교토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일 정도.



우지로 향하는 전차는 한산했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지 않아도 되는 나 같은 종류의 여행자에겐 두 가지 정도의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 저렴한 날짜와 시간대를 선택해서 떠날 수 있다는 점과, 이렇게 한산한 시간대에 그 날의 첫 스케줄을 시작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점.


원래부터 향토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교토시지만 훨씬 더 교외로 떨어진 우지로 향하는 전차에 앉아 차창을 바라본다. 바깥 풍경이 아득히 화창하다. 빠르게 지나치는 여름 시골 풍경이 내 마음에 다시 여객의 들뜸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기보다, 어딘가로 가는 그 행위 자체를 더 좋아하기에 매번 짐을 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목적지이자 종점인 우지에 닿았다. 항상 느끼지만, 교통수단의 아나운스를 들을 때야말로 해외에 와 있다는 인상을 가장 강하게 받곤 한다.



우지강宇治川을 건넌 곳에 무라사키 시키부의 석상이 있었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여류 소설가의 작품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그중 마지막 몇몇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 이곳 우지다. 


뵤도인 참배로


길을 따라 뵤도인平等院 오모테산도로 들어섰다.

차를 볶는 구수한 향기가 참배로에 가득 차 있었다. 녹차를 볶아 만드는 호지차. 일본의 차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 그 부드럽게 타오르는듯한 향기는 내리쬐는 태양빛에 섞여 마음속 눅눅한 구석까지 훈훈하게 만들어 준다. 마음의 일광 소독에 곁들이기에 이보다 어울리는 향이 있을까. 호지차의 그윽함은 여름 태양빛과 많이 닮았다.


십엔짜리 동전에 새겨진 뵤도인의 봉황당. 아쉽게도 현재는 공사 중이라는 소식. 그래서인지 매우 한적하기만 한 참배로에는 관광객도 얼마 눈에 띄지 않는다. 피서를 위해 사람들이 모두 실내로 들어가 고요해진 여름날의 야외. 이 새하얗게 밝은 정적을 나는 옛날부터 참 좋아했었지. 



참도의 끝자락에 있는 가게에서 말차 소프트크림을 부탁했다. 갈증을 채워주기에는 너무 텁텁해서 목이 메는 느낌이지만 그럭저럭 열기를 식혀준다. 건너편에는 녹차 소바를 파는 가게들도 보인다. 우지는 녹차의 고장이기에 이렇게 차를 소재로 한 상품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우지뿐만 아니라 교토 전역에서 말차에다 '일본의 에스프레소'라는 이미지를 붙여 해외에 알리려 노력 중인데. 우리나라의 차 문화는 어디로 가버렸기에 모두들 커피만 마시고 있는 것일까.



여느 때처럼 목적지 없이 헤맨 걸음이 '겐지모노가타리 뮤지엄'이라는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관내의 전시물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인형을 이용한 단편 영화가 상영 중이길래 두 편을 내리 감상했다. 대조적인 성격의 두 남성으로부터의 구애에 번민한 나머지 우지강으로 투신의 결의를 한 우키후네浮舟의 이야기가 뇌리에 남는다.


우지 킨토키


우지에서도 가장 유명할 차방 중 하나일 나카무라 토키치中村藤吉. 먼저 본점을 찾아갔으나 길게 늘어선 줄에 입점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점두에서 주인 할머니로 보이는 분이 권한 녹차를 맛볼 수 있었다. 냉수에 그대로 우린 어린잎에서 느껴지는 아미노산의 맛이 놀랄 만큼 산뜻했다. 미원을 먹는 것 같다는 이유로 녹차를 마시지 않는 가게 스텝분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번진다. 

언덕길을 도로 내려가 뵤도인 오모테산도로 들어서는 초입에 나카무라 토키치의 분점이 하나 더 있다. 다행히도 이곳엔 기다리는 줄이 없었다. 자리로 안내되자마자 주문을 부탁한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우지킨토키宇治金時. 우리나라의 빙수와 거의 같은 디저트. 우지에서 쏟은 땀을 달콤한 흑당 시럽을 끼얹은 얼음으로 보충해 본다. 쌉쌀한 흑당과 얼음의 조합이 좋았다. 앞으로 여름이 될 때마다 이 맛이 생각날 것 같은데. 

 


돌아오는 길 다리에 서서 우키후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차가운 물에 몸을 던질 결심을 할 만큼 세상을 살아갈 의지를 상실하는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절망일까 아니면 용기일까. 의미를 찾지 못한 삶일지언정 내일을 위해 오늘을 버텨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버텨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내일 도대체 어떤 반가운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오늘을 버티란 말인가. 

번뇌의 조각배가 우지강을 따라 흘러간다.

빠른 유속의 우지강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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