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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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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r 22. 2016

비파호수의 소나기


팔월의 오후 

점심 무렵부터 먼 천둥이 들려온다. 하늘 저편에서 잔잔히 그리고 느긋하게 다가오는 그 소리에 어쩐지 마음이 들뜬다. 무거워진 공기 냄새. 몇 시간 뒤면 한바탕 쏟아질 게 틀림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자리 찾아 앉기도 힘들 텐데..."


우리는 벌써 한참 전에 외출 준비가 끝났는데 이층 화실和室에 머물고 있는 유럽인 부부가 도통 내려올 줄 모른다. 오늘 비와코 불꽃놀이대회에 가는 인원은 나와 여주인 그리고 저 두 사람이 전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여유롭기만 한 여주인. 보라색 나팔꽃 무늬의 흰 유카타가 평균보다 훌쩍 큰 키의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린다. 나는 상점가에서 오백 엔 주고 사 온 감색 진베甚平를 위아래로 걸치고 며칠 전 선물 받은 나루토 문양 게타를 직직 끌면서 지루한 티를 내고 있었다.


식품 알레르기가 있다는 위층 부인은 곡물이 많이 쓰이는 일본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못하는 듯하다. 음료 역시 유럽산 수입품만 고집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음료라는 것이 언제나 탄산음료나 술 따위였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알레르기란 심인성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말았다. 음식을 가려 드시는 것치곤 꽤 통통하시기도 하고... 못 드시는 음식이 많은 만큼 한 종류를 대량으로 드시는 걸까? 


'아니, 이런 생각은 실례겠지.' 


그렇게 한참을 더 기다려서야 드디어 한 손에 오랑지나 병을 든 부인이 나타났다. 지친 듯한 표정의 남편을 뒤에 데리고서.


"자, 출발할까요."  



비와코로 가는 전차를 타기 위해 케이한 산조역까지 걷기로 했다. 고요한 유미야쵸弓矢町 뒷골목으로부터 바로 맞닿아있는 켄닌지를 가로질러 하나미코지花見小路까지 나서는 사이, 어느새 주변 풍경은 북적거리는 관광지로 변모한다. 정말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진 도시다. 

시조 근처의 모퉁이 과자가게에서 간장 바른 센베를 하나씩 사 들자 우리도 그 인파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모양새였다.  


"그 게타, 좀 작지 않아요? 한국 남자들은 여기 남자들보다 어째 몸이 다 큰 것 같아."


"조금 작지만 괜찮아요. 신다 보면 편해지겠죠."


게타를 내려다보는 내 차림새에 문득 깨닫고 만다. 이거... 거의 속옷바람이나 마찬가진데. 평소라면 이렇게 입고서는 집 앞 가게에 가는 것 조차 무리였을 텐데. 그게 오늘은 전차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야 하는 곳까지 가야 한다니. 여름의 열기와, 어쨌든 이방인이라는 내 포지션. 그리고 축제 구경이라는 특수성을 마음의 면죄부로 삼아야 하나. 진베차림의 젊은 남자도 꽤 활보하고 다니기 시작한 계절이긴 하다만.


琵琶湖비와코


전차를 내리자 느긋한 행렬이 저 멀리 수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와, 저건 거의 바다잖아. 


호반은 인산인해였다. 불꽃이 잘 보일 법한 앞줄엔 도무지 한 명 앉을자리조차 찾기 힘들어 보이는데도, 여주인은 거침이 없다.


"저기, 그 옆에 자리가 남는 것 같은데, 같이 좀 앉죠?"


젊은 부부로 보이는 일본인들은 묵묵부답 쏘아보기만 할 뿐이다. 여주인은 몇 번 더 말을 섞어 보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하... 이런 경우에 일본인들은 도무지 융통성이 없다니까요."


변명이 아니라 진심으로 화가 난 듯 우리들에게 토로하는 그녀.

융통성이라.

일부러 일찍 도착해서 미리 잡아 놓은 자리일텐데. 감히 흙발로 침범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군말 없이 내어 주는 것이 융통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일까. 

위층 부부도 앞자리에 특별히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뒤에서 서서 보는 것도 전혀 상관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노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 


저도 물론 동의합니다.


호수에서 좀 떨어진 잔디밭에는 그래도 앉을 만한 공간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돗자리가 아닌 담요를 챙겨 온 여주인. 당황해 웃는 우리들을 무시하고서 기세 좋게 자리를 편다. 흙바닥에 요를 깔고 눕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뼛주뼛 앉을까 말까 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언제 다녀왔는지 야끼소바를 사람 수만큼 사가지고 와 내밀었다.


"배들 고프죠?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계란 프라이와 생강이 올라간 야끼소바를 다 해치우고도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알레르기 여사와 짧은 영어 실력으로 나누던 대화도 슬슬 지루해질 무렵, 툭. 투둑... 


한참을 꾸물거렸던 여름 소나기夕立는 그렇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고 맹렬한 빗줄기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들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아득히 묻혀버릴 만큼 굉장한 기세다. 백색 소음이 내리는 것 같다. 살이 아플 만큼 때리는 빗줄기에 자리를 정리하는 둥 마는 둥 근처 나무 아래로 뛰어들어가 비를 그을까 했지만, 이내 관두고 만다. 이미 홀딱 젖은 진베가 몸에 착 달라붙어서 체온과 함께 전의마저 모조리 빼앗아 간 것이다. 


'불꽃놀이고 뭐고 그만 돌아가고 싶어 졌어. 물에 젖은 속옷만 입고 광장에 내던져진 기분이잖아.'


아니, 기분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꼴이었지만.


끊임없이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빗줄기. 카메라가 다 젖었다며 울상이면서도 어쩐지 유쾌해 보이는 위층 부부에게 위안을 얻으며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여름 소나기 변덕은 쏟을 만큼 쏟아 낸 비구름들을 모아 히에이잔比叡山 너머로 흩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시 하나 둘 나타나 자리를 잡는다. 우리들도 어차피 다 젖었겠다, 바닥에 깔아놓은 축축한 담요 위에 대충 앉았다. 이제는 흙바닥이고 뭐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 불꽃놀이는 예정대로 시작될 것이라는 장내 방송이 들려왔으니, 이젠 하늘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리면 될 터이다.


이런 색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지는 태양. 저녁놀. 햇볕은 과연 모든 색을 품고 있었나 보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하늘을 따라 시선을 떨구자, 핑크빛 하늘에 어울릴 법한 광경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 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과 소녀. 그들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과 긴장감. 그것을 애써 지우려는 듯 연신 수줍게 짓는 미소와, 아무래도 좋을 잡다한 화젯거리들. 소년은 과장된 몸짓으로 무엇인가를 계속 설명하려 애쓰고, 소녀는 그저 웃으며 몇 마디 받아칠 뿐인데도... 행복이라는 추상이 둘 사이에선 실존하는 듯하다. 그 순간 소년이 고쳐 앉으면서 들고 있던 우산이 내 앉은 다리를 살짝 쳤다. 그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수였다는 의미로 가볍게 목례만 하며 웃는다. 그리고 이내 자신들만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모르는 사람에게 끼친 작은 폐 정도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그것은 실제로 그러했다.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너무나 충실하고 순수해서였을까, 그 순간만큼은 외부의 어떤 요인도 그 둘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의 대화를 끊어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죄책감마저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아름다운 찰나였다. 의심 없이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는 순수함. 어떤 노력도 필요 없는, 오히려 노력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질 그런 종류의 사랑. 


타인에게 가감 없는 한마디를 뱉기도 힘든 나이가 되어버린 내게도 또다시 저런 장면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남아 있을까 궁금하다. 진심으로 궁금하다.



날이 저물고 불꽃은 예고도 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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