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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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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r 25. 2016

비파호수의 불꽃놀이


첫 번째 불꽃이 호면을 따라 올라간다. 그것은 수평선 아득히 새까만 하늘을 잠깐 동안 가로지르고 곧바로 사라진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고선 화려하게 흩어진다. 어디에 저렇게 많은 빛을 숨겨 놓았을까 놀랄 만큼.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불꽃이 연이어 올라가고 하늘은 곧 별천지가 된다.   


"와... 하하. 와아..."


오늘 불꽃놀이대회花火大会가 내게 어떤 신선한 즐거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최근의 나는 무슨 일을 겪던 무심한 표정으로 빈약한 리액션만 보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탄성과 웃음이 멈출 줄 모른다. 어째서일까. 

뭍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어둠에 숨어 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호면의 빛이 올라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둠 속에 숨어서 그렇게 아무도 의식하지 않을 때만이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살던 아파트 단지는 올림픽공원과 한강 사이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게 불꽃을 목격할 기회는 퍽 많았었다. 아마도 서울에서 있었던 하계 올림픽에서부터 시작될 불꽃의 기억. 그것들은 수천수백 발의 굉음과 함께 내 뇌리 여러 군데에 지겹게 박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불꽃은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호수 위 허공으로 펼쳐진 시야에는 오로지 빛의 파편만이 가득하다. 그 파편들은 시신경을 따라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것들과 똑 닮은 무엇인가를 자꾸만 떠올리게 하고 있다. 가슴을 후벼 파는 그 무엇인가를. 자꾸만 자꾸만.


'이런 광경은 난생 처음이지만, 저것들과 닮은 것이라면 전에도 본 기억이 있지.'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삶 가까이에 나타난다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뒤흔들어 놓는지.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존재가 어쩌면 내 삶에도 넌지시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꿈. 희망. 혹은 철없는 욕망.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을 것이지만. 그것이 나 같은 평범한 사내에게서 아름다운 미소를 거두지 않았을 때 미리 포기할 줄도 알았어야 했는데. 이제는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고약한 기억이 되어버린 먼 꿈. 그런 첫사랑 같은 꿈을 우리는 모두 하나쯤 품고 있지 않은가.

그것에 억지로라도 이름을 붙이자면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불꽃놀이는 그 애달픈 기적과 닮아 있다.

화려하게 빛나고 다음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무척 아름답다.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될 만큼. 오랜만에 진심으로 순순히 웃음이 난다. 그 꿈만이 여전히 나를 나로서 돌아보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단 말인가. 나에게 사랑만을 주는 것을 대할 때조차도 눈꺼풀에서 의심을 걷어내지 못 하는 그런 쓸쓸한 어른이 되어가고. 그런 내게 실망감을 안고. 또 그런 나를 닮은 쓸쓸한 어른들 사이에서 발 붙일 곳을 못 찾고. 그렇게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숨을 곳을 찾다 떠나온 곳이 이 곳 교토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는 아직 진짜로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너랑 같이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내게 소중한 누군가가 있었던 시절은 이미 오래된 기억이고, 어떤 이도 지금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지 않을 텐데. 기이했지만 되묻지는 않았다. 분명 잠시 누군가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지. 기억에서 잊힌 누군가를.


긴 기다림에 비해 너무 짧았던 불꽃놀이는 가장 화려한 몇 발을 피날레로 끝이 나버렸다. 기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지도 모른다. 고요한 호수 위에 자욱한 연기를 남기고 말았으니. 그러고 보니 풀리지 않고 맺힌 한을 일본에선 타다 남은 연기에 빗대곤 하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세 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그중 두 시간은 전차를 기다리는 행렬이었다.


"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서 계시느라 건강에 이상이 생기신 분들은 행사 요원들에게 즉시 알려주십시오!"


"비가 그쳐서 다행입니다만, 막차 끊기기 전까지는 돌아가고 싶습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소탈한 방송과 들뜨고 행복해진 사람들의 기운 덕택인지 흠뻑 젖은 머리와 속옷도 더 이상 나를 속상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젖은 옷은 나도 모르는 사이 마를 테고 맺힌 연기도 언젠가는 가실 것이다. 마음속 수평선까지 뚜렷이 보일 만큼 맑아진 어느 날, 다시 마음속 불꽃을 터트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본 비파호수의 하늘은 벌써 산뜻하게 개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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