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유목민의 단상

by 익호

총 일곱 칸짜리 내 자취방 싱크대의 상부장 중 한 칸은 오로지 차 종류로만 가득 차 있는데, 물론 내가 커피보다 차를 훨씬 선호하고 또 거의 매일 소비하기에 사실 이걸로도 공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도 종종 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까지 많은 종류의 차를 쌓아두고 나 혼자서 기한 내에 소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내 ‘차 저장 창고’는 늘 지금의 규모를 유지해 왔던 것 같다. 그 가장 큰 이유는, 20년 넘는 세월 동안 차를 즐겨온 나지만 여전히 '차 유목민'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딱 맞는 차를 하나 꼽아보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즉각 '아직 찾지 못했다'일 것이며, 누구나 좋아할 만한 추천 리스트로 만들어 달라고 해도 고작 3~4종이 될까 말까. 그만큼 정말 맛있는, 입맛에 딱 맞는 차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 유명 브랜드의 스테디셀러 라인들은 당연히 그 나름의 훌륭함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한 차들이 지닌 '훌륭함'이라는 요소가, 내가 차에서 원하는 요소에 언제나 적합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입맛은 모두 다른 데다, 차에서 얻고자 하는 즐거움도 모두 다르기에.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개당 50원 남짓한 벌크형 티백이 최고급 한정판 상품보다 흡족하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차 유목민’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 같다. 특히 최근엔 커피 대신 차를 소비하는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입맛에 딱 맞는 차를 찾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차의 맛을 좌우하는 건 차 그 자체의 성질이 가장 중요한 요소지만, 그 외에도 다기의 종류와 쓰이는 물, 우리는 방법, 온도와 시간 등에 의해 또다시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요소는 내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속한다. 가장 큰 복병은 계절과 날씨(온도, 습도), 차를 마시는 공간과 시간, 개봉 후의 숙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몸의 컨디션이 정말 중요한 요소다. 큰맘 먹고 구입한 고급 수입차종이 기대와는 다르게 별 감흥을 주지 않았던 적도 많은데, 그 차를 한동안 잊어버리고 나서 또 다른 계절, 다른 시간대, 다른 컨디션일 때 우연히 꺼내 마시고 나서 새로운 감동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거의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는 ‘쓴 물’ 같은 영국차도 어느 겨울날 아침 대충 머그컵에 우려 마셨을 때 신기하게도 달콤한 느낌과 함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술술 넘어가는 경험을 한 적도 있고. 차란 건 인간이 부여한 퀄리티 자체보다는 나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가 중요한 기호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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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홍차에서 우롱차로 조금씩 관심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홍차 자체도 강한 발효차보다는 섬세한 향을 즐길 수 있는 고산차류에 관심이 많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취향도 바뀌는 걸까? 아직까지 녹차 종류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어쩌면 10년, 20년 뒤에는 그 매력을 알아차릴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요즘 가장 많이 마시는 차는 대만산 우롱차. 지식은 부족하지만 공부차나 서요랑다원같은 대중 브랜드만 시도해도 아직 충분히 그 매력을 즐길만한 시기. 특히 동방미인차는 거의 매일 마시는 차로 자리 잡은 듯. 홍차에서 인생 차를 아직 건지지 못한 채 우롱차로 흥미가 이동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해도… 얼마 전 ‘더정 우롱티 프로젝트’라는 대만발 우롱차 테이크아웃점을 방문하기 위해 서촌에 들렀었는데, 우롱차로 만든 밀크티의 매력에 새롭게 빠지게 되었다. 올여름은 집에 있는 우롱차로 아이스티와 밀크티를 잔뜩 시도해 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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