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고민도 좋지만, 결국은 OOO다

by 익호

바이엘을 첫 교재로 정했지만 준비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산수 교과서에 익힘책이 따라붙듯, 피아노를 배우는 데에도 응용 교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완전 초보자나 다름없는 내게 적합한 응용 교재, 즉 ‘연주곡집’으로는 피아노 소곡집이나 동요곡집 정도가 떠오른다. 두 곡집은 당시 누구나 알만한 곡들을 통해 즐겁게 피아노를 연습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초보자들에게 자주 권장되곤 했다. 그런데 옛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이 두 책 모두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다. 성인이 된 지금은 조금 달라졌을까. 어린 시절의 내가 이 책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순 없지만, 현재의 시선으로 보아도 이 교재들에 썩 호감이 가지는 않는다.


두 곡집에 수록된 다수의 곡들이 애초에 피아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거나 혹은 초보자의 수준에 맞춰 과하게 편곡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짜인 악보는 가볍게 즐기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학습 효과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운지법 등 기술적인 면에서 ‘정석’을 익히는 데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후에 소나티네 등 전통적인 음악 문법으로 쓰인 교재로의 확장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브루크뮐러의 《25개의 연습곡》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초급용 교재 중에서 음악성과 기술적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교재로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은 찾기 힘들지 모른다.

내가 당시 낭만시대 음악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은 고려 대상에서 빼야 하겠지만.

나는 곧바로 브루크뮐러에 도전하지는 않았었다. 이때 내 수준으로는 기초 쌓는 연습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던 게 그 이유다.

사실 초보 단계에서 응용 교재 선택은 조금 천천히 생각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다.


다만 이 단계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교재가 있기는 하다. 바로 손가락 훈련을 위한 엑서사이즈 교재다. 그리고 그 대표주자라고 한다면 단연 하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듣기론 하농은 전공자나 혹은 피아노 교수법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상반되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반드시 전곡을 마스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선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둘 다 일리 있는 주장이라 본다. 다만 하농이 필요한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으로 나뉠 뿐.

구체적으로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계속해 온 경우에는 연습마다 반드시 하농을 도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반면, 성인 초보의 경우 이 하농이야말로 매일매일 반드시 연습해야 하는, 사실상 가장 중요한 교재라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온 이들은 다양한 음형을 자연스럽게 경험하며 성장한다. 그에 맞춰 손가락도 단계적 성장을 거치게 되므로 하농을 병행하지 않아도 테크닉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신체적・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 반면 성인의 경우, 이미 다 자란 손가락으로 정형화된 운지법을 일방적으로 따라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새로운 테크닉을 요구하는 음형이 나올 때마다 적지 않은 난관에 부딪힐 때가 많다. 이를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반복적인 엑서사이즈 외에 달리 없을 터.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가장 널리 쓰이며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교재가 바로 하농인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충분한 시간을 피아노에 투자할 여유가 있다면(거기에는 남다른 의지력도 필히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굳이 하농을 칠 필요 없이 다양한 연주곡 위주로 연습해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과 나 같은 성인에게 그러한 여유는 없다. 조금이라도 질러가는 길이 있다면, 놓치지 말고 그리로 향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배움에서 ‘기본기의 반복적이고 집요한 연습’만이 검증된 ‘유일한 왕도’다.


하농에 실린 연습곡들엔 음악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고들 한다. 대부분이 다장조의 흰 건반만을 쓰는 손가락 훈련이며, 반복되는 음형을 통해 다섯 손가락을 균등하고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 기본 목표인 교재이기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쓰인 것. 하농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러한 ‘음악성의 부재’를 비판의 구실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초보자들에게는 오히려 이러한 ‘단순함’이 굉장한 장점이 될 수 있다.

미묘한 감성과 표현의 영역은 잠시 미뤄둔 채, 오로지 손가락 움직임에만 기계적으로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난 지루하고 음악적 감동 없는 하농은 치고 싶어 하지 않았었다(이쯤 되면 내가 좋아했던 교재가 과연 있기는 했는지 싶지만).

그러나 이미 서른이 훌쩍 넘은 내게 차라리 별다른 생각 없이 몰두할 수 있는 이런 형태의 교재가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구원으로 다가왔었고,

이 책이 전문 연주자를 꿈꾸는 어린이보다는 성인 취미생에게 더욱 적합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


교재에 대해 벌써 몇 차례나 두서없이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사실 어떤 교재든 초보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한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교재들은 대부분 긴 세월 동안 검증을 거쳐 살아남은 것들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신뢰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 성인들은 시간, 공간, 편견 없는 순수함 등 유년기에 가졌던 자유로움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하루를 아무리 쪼개어 봐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어려우며, 누군가가 임의로 정해 준 교재와 교수법을 그대로 받아들일만한 순수성도 없다.

그렇기에 교재 하나 고르는 데에도 이렇게까지 신중해지는 것이리라.


어떤 교재를 선택할지, 어떤 길을 택해야 더욱 효율적일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한 음이라도 더 쳐보는 일이다.

그 사실을 잘 이해하면서도 늘 무언가를 계산하고, 좀 더 쉽고 효율적인 길은 없을까 잔머리를 굴리곤 하는 게 우리 어른들의 전형이라는 건 조금 서글픈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을 배우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교재나 연습법이나 레스너 선택 같은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피아노에 앉는 버릇부터 먼저 들이자.

서른넷의 내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고, 현재의 나도, 아쉽지만 여전히 알지 못한 채로 있다.

다만 확실한 건, 초보 시절의 나는 거의 매일같이 피아노 앞에 앉았고, 꽤 만족스럽게 그 시간을 즐겼다는 것.

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하고 몰입하는데서 얻는 순수한 만족감. 취미 연주자에게 먼저 필요한 건 그것만이 유일하다.

눈과 머리로 성장의 지름길이야 찾을 수 있을지언정, 결국 피아노는 앉아서 쳐야 느니까.

교재 고민도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손, 그리고 엉덩이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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