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보다 짜릿했던 해프닝
우리 첫째 딸, 씨에나는 참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였다.
중학생 때까지는 내가 며칠이고 밤을 새워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고1 때부터는 그녀가 대신 꼼꼼하게 겨울 여행을 준비했다.
그 덕분에 나는 늘 편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수능이 끝난 뒤, 씨에나는 이번엔 항상 가던 일본이 아닌
따뜻한 휴양지로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카드를 건네주었고,
엄마는 “1월 1일부터 5일 새벽까지 시간이 되니 계획을 짜보라”고 했다.
띠링, 띠링.
카드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렸고,
우리는 여행을 기다리며 설렘에 젖어 있었다.
마지막 날은 좋은 호텔에서 묵고 싶다며
엄마의 승인을 받고 싶다고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퇴근한 엄마와 와인 한 잔을 나누며
씨에나는 호텔 사진들을 보여주며 물었다.
“여기로 가도 돼?”
“이걸로 예약해도 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씨에나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엔 잘 안 보던 결제 내역이 문득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앗! 날짜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씨에나, 날짜 잘못한 거 같은데?”
“응? 아닌데, 비행기도 다 그렇게 했는데…”
“엄마가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했잖아!”
“아니, 난 한 번 그렇게 생각하니까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맞다.
나도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면
상대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들려도 내 방식대로 해석해 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패닉에 빠졌다.
결국 결제 취소 작전을 짜야 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아*다 같은 여행 에이전트는 취소나 변경이 쉽지 않다.
그래도 ‘모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엄마 아빠가 어렵게 보내준 유학에서 배운 영어 실력을
마구 뽐내며 본사에 메일을 보냈다.
한국 지사는 원칙만 고수할 테니,
결정권은 본사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토요일 오전을 몽땅 갈아 넣어
20통의 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수수료를 제외하고 환불을 받기로 했다.
물론 큰돈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졌다.
처음엔 “돈을 다 날리고 여행도 못 갈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렸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이란 참 묘하다.
처음엔 바닥을 예상하다가,
막상 그보다 덜 잃게 되면
“이 정도면 이득이지!”
라는 생각이 든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걸 참조점 효과라고 부른다.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결과도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전부 잃을 것’이라는 기준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일부만 잃고 환불을 받자
그 결과가 오히려 이득처럼 다가왔다.
그날의 해프닝은 돈보다 더 큰 걸 가르쳐주었다.
삶은 늘 손실과 이득이 뒤섞여 오는데,
어떤 기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손실이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이 결국 웃음이 된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우리는 이 일을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카드가 얼마나 울렸는지 기억나?”
“토요일 오전 내내 영어 메일을 주고받던 거 생각나?”
그렇게 웃으며 떠올릴 수 있다면,
이 경험은 이미 좋은 추억이 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날짜를 잘못 잡아 생긴 작은 해프닝을
함께 풀어내며 또 하나의 경험을 쌓았다.
토요일 오전 내내 영어 메일을 주고받으며
“엄마가 최근에 쓴 영어 중에 가장 많은 영어를 쓰고 있어”
웃음 섞인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카드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던 그 순간도,
지금 돌아보면 여행보다 더 짜릿한 모험 같았다.
물론 큰돈이 오갔지만,
그보다 더 값진 건 이 모든 과정이
우리 가족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삶은 늘 계획대로만 흘러가진 않는다.
때로는 발등 찍히는 순간이,
훗날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남는다.
다음번에는 꼭 내가 이중 체크를 해야지 다짐하면서,
나중에 씨에나가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가서
더 큰돈을 가지고 예약하게 되었을 때
이 경험이 더 큰 보상이 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주말 이야기는
하나의 따뜻한 이야기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이제, 여행을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