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는 낙인이 아니라 무늬다
사람들은 팔자를 운명이라 부른다.
운명은 하늘이 정해놓은 길,
팔자는 태어날 때 찍힌 도장이라 한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손에 쥐어진 인생 사용 설명서 같다.
하지만 살아보면 알게 된다.
운명은 정해진 길만이 아니고,
팔자는 바꿀 수 없는 각본만이 아니다.
길은 이미 놓여 있지만,
그 길을 어떻게 걸을지는 내 발걸음에 달려 있다.
팔자는 습관처럼 반복되지만,
습관을 바꾸면 길의 풍경도 달라진다.
팔자는 타고난 기질에서 시작되지만,
주변이 그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두면 굳어지고,
다르게 이끌어주면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씨앗은 태어날 때 이미 품어져 있지만,
어떤 흙에 심기고 어떤 햇살을 받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꽃을 피운다.
팔자는 그렇게,
성향과 환경이 함께 빚어내는 무늬다.
나는 딸 둘을 키우며 나는 그 무늬를 본다.
우리 집은 모두 부지런하다.
성실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는 부모님 덕분에
나는 새벽이 오면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한다.
둘째도 이불속에서 “더 잘래”를 외치지만
결국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하지만 큰딸은 다르다.
그녀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신이 원할 때 일어나고,
원할 때 움직인다.
깨워도, 달래도, 화를 내도 소용없다.
그 모습은 아빠를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신혼 시절, 나는 아침마다 음악을 틀고 하루를 열었지만
전남편은 늘 늦잠을 잤다.
나는 그것을 게으름으로 보았고,
주말을 잠으로 보내는 그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깨우기도, 달래기도 했지만
달라지지 않는 모습에
결국 그냥 놔두었다.
지금은 큰딸에게도 그렇게 한다.
그녀의 시간을 존중하며, 그냥 놔둔다.
그러다 보니
아침 시간에 그녀의 시공간은 존중받는다.
오히려 작은 딸이 부비적거리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작은 애 방에 가서
아이를 업고 나오든
달래서 나오든
아이를 데리고 나오신다.
그렇게
둘의 아침 모습은 다르다.
큰딸은 언제나 진취적이다.
여행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이미 축제를 시작한다.
택배 상자 속에 쌓이는 옷들,
화려한 칵테일 바를 검색하며 그려보는 설렘,
바닷가와 수영장에서 펼쳐질 순간들을 미리 마음에 담는다.
심지어 비행기 표를 잘못 예약해 고생을 했을 때조차
그녀는 그 사건을 여행의 한 장면으로 바꾸어버린다.
삶을 긍정하는 힘,
그것이 그녀의 팔자를 스스로 새기는 방식이다.
반면 둘째는 다르다.
그녀는 길을 걸을 때 늘 다른 사람의 발걸음을 먼저 살핀다.
운동선수라는 이유로 휴가가 어렵다고 말하며
여행을 계획하는 순간부터 부담을 느낀다.
여행을 가드라도
돈을 쓰는 엄마를 걱정하거나
본인이 찾아서 가성비 좋은 숙소 식당등을 찾아낸다.
그래서 호사스러운 여행은 그녀에게 언제나 멀리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운동선수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여행 자체가 그녀에게는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단체를 먼저 생각하는 습관,
그녀의 자리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생활은 비교적 한정적이다.
결국 첫째는 3년 내내 나와 여행을 다녔고,
둘째는 여행을 쉽지 않은 일로 만들어버렸다.
팔자는 단지 하늘이 새겨놓은 낙인만이 아니다.
타고난 기질이 씨앗처럼 주어지지만,
그 씨앗을 어떤 흙에 심고 어떤 햇살을 받느냐에 따라
모양은 달라진다.
나 역시도
나의 기질과 주변의 상황
혹은
그날의 기분 역시
나의 팔자를 나 스스로 정해 놓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그 사랑은 나를 삶과 화해하게 하고,
내가 걷는 길을 고요한 축제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상처받을까 걱정하여 못하는 사랑은 나에게 추억을 앗아 갈 것이고
주변의 눈치를 보다 못하는 행동들은 나에게 기쁨과 슬픔을 모두 가지고 갈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내 삶을 하나의 아름다운 무늬로 완성한다.
그 무늬 속에서 나는 오늘을 껴안고,
내일을 기다리며, 모든 순간을 사랑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