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주헌 Jun 14. 2020

욜로 교과서, 그리스인 조르바

욜로 열풍의 빛과 그림자

You Only Live Once     


  YOLO, 당신은 단 한 번 뿐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이 매력적인 표어는 대한민국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인생은 한 번 뿐이니 현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라는 욜로신의 지시를 충직하게 따르는 신도들이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뜨기 시작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 ‘소확행’의 유행 역시 욜로교의 일환이다. 대입을 위해, 취업을 위해, 집과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생활하던 이들에게 욜로교의 포교는 참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욜로신의 부름에 이끌려 최근까지도 충직한 신도 생활을 보냈다. 현재의 행복을 찾는 것이 이제까지의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소한 행복을 찾아갈 때면 삭막한 세상의 기준에 충족하지 못해 좌절하던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욜로신의 가르침은 분명 나에게 중요한 하나의 배움이 되었다. 하지만 평생 욜로 신도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무언가 어색한, 세상이 흘러가는 평행선에 어긋난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내가 겪은 욜로에 관한 일련의 과정들은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으로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가 이른바 자유인 뽕에 맞아 욜로에 푹 빠지게 해준 책이자, 동시에 골로 가지 않기 위해 욜로교를 탈교하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현실과 욜로 사이의 미묘한 이질감을 간접 체험시켜주는 욜로 지침서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조르바라는 인간상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드러내 보이는 소설이다. 조르바는 그 누구보다도 욜로 라이프를 만끽하며 살아간다.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이 세상을 떠돌며 그 때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하며 살아간다. 흡사 몇 년간 나홀로 세계를 여행하며 새로운 이들과 어울려가는, 이 시대에선 동경 받는 당찬 세계여행자처럼 느껴진다. 그의 경험치는 지구상 누구를 만나도 꿀리지 않는 오오라를 만들어주었다. 아틀라스가 짊어진 지구 위에 거침없이 올라탄 셈이다. 세상 위에 올라탄 조르바는 노련한 직감을 가지고 무리를 이끌기도 하고, 성과를 이룩하기도 한다. 조르바가 보여주는 행위는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일 뿐인데 말이다.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여행을 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던 나같은 사람들에겐 실로 존경스럽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조르바를 동경했다. 욜로교에 대한 나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째로 읽었을 때, 나는 조르바라는 거인에 가려 희생당한 무수한 영혼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인간의 감정은 청개구리보다도 변덕이 심한 요물이다. 조르바는 그 요물을 컨트롤하지 않고 마음껏 발산하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녀석이다. 쉴틈없이 승화하는 드라이아이스처럼, 감정을 담는 틀 따위 없이 발현하는 즉시 분출한다. 그 무자비한 분출에 고초를 겪는 이들은 결국 주변인이다. 누군가는 그의 분노에 폭행을 당하고, 누군가는 그의 성욕에 능욕을 당한다. 그의 직관에 감탄하여 함께하던 이들은 결국 그의 직관을 이해하지 못해 떠나간다. 이러한 주변인의 희생에도 조르바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그 때 그 때 떠오르는 새로운 자신의 감정을 따라 움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자비한 감정의 분출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신격화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 책을 읽을 때 특히 주의해야할 점이다. 타인의 자유와 상생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짐승의 본능과 인간의 자유는 분명히 다르다. 욜로가 담고 있는 "어차피 한번뿐인 인생!" 마인드는 자칫하면 그릇된 욕망의 배설을 정당화할 수 있다.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겪어보지 않았는가? 누군가를 폭행하고, 추행하고, 깎아내리면서 쾌감을 얻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마치 무용담인 양 포장하여 떵떵거리는 이들의 모습을. 조르바의 무용담은 대개 이런 류의 것이었을 거다. 이쯤되면 우리는 욜로가 위험한 게 아니라, 조르바가 욜로를 대변할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욜로로 산다는 것은 무심하게 입에 올릴 정도로 가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와 사회에 의해서 통제받는 삶을 살아왔고, 어느정도 정형화된 삶의 커리큘럼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욜로로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존의 삶의 터전을 뒤바꿀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행동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결단 없이 욜로라는 무지개를 쫓는 사람들은 결국 주변을 지치게 만든다. 욜로 욜로 하다 골로 가는 사람들은 욜로 신자 본인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 그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사람들, 그를 위해 희생을 감내하던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인생은 한번 뿐이지만 그 인생에 나 자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욜로는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뒤바꿀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 도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무인도가 아닌 21세기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이상적인 욜로 라이프가 아니라, 욜로에 빠져들게 된 우리 사회에 주목해야 한다. 왜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욜로에 빠지게 되었을까? 이 시대에 결핍되어있는 간절한 그 열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차오르는 감정의 욕구가 해소되지 못하고 응축되어 쌓여갈 때, 마음엔 응어리가 진다. 응어리진 감정은 자아 결핍의 형태로 남는다. 따뜻한 말로 위로를 건네는 에세이가 연일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난데없는 퇴사 열풍이 부는 것 역시 모두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욜로라는 달콤한 표어는 결핍을 채워주는 우물샘과도 같다. 이제 다시 조르바를 바라봐 보자. 모든 감정의 욕구를 죄다 소화시켜버리는 조르바는 얼마나 대단한 미친 놈인가. 동경심이 일었던 나 자신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욕 하는 걸 참고 속에 담아만 두면 병이 되고, 그 때 그 때 욕을 뱉어내버리면 정신적으로 오히려 건강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리 사회에 결핍되어 있었던 건 먹는 족족 분출해내는 조르바의 거침없는 토악질이 아니었을까. 


 현실과 욜로의 미묘한 이질감은 여기서 드러난다. 우리는 모든 감정의 욕구가 소화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랬다간 곧바로 철창 행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사회의 시스템에 속해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변덕스런 감정을 잘 조절하며 조화롭게 살아가야하는 인생을 부여받은 셈이다. 하지만 욜로가 추구하는 행복은 이상적인 것이다.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우리는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면서 통제에서 벗어난 삶을 꿈꾼다. 이것이 바로 현실과 욜로 사이 이질감의 정체다. 인생은 언제나 행복할 수 없고, 언제나 나만을 위해 살아갈 수 없다. 때론 누군가와 타협해야 하고, 때론 당장의 달콤함을 포기해야만 할 때도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점점 너무나 많은 타협을 강요하고 너무나 많은 포기를 당연한 듯이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통제의 시간이 길어지는 반면 적절한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억눌려 살아왔던 기나긴 통제의 시간의 반대급부로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지금의 욜로다.


 욜로 대유행을 좋게만 볼 수도, 나쁘게만 볼 수도 없는 이유다. 욜로의 유행은 우리가 억눌려 살아왔다는 방증이다. 무자비한 조르바가 신격화될 만큼, 조르바적 요소가 사회에 결핍되어있다는 지표다. 그러니까 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은 욜로를 꿈꾸는 이들, 욜로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욜로에 막연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 모두에게 유의미한 교과서가 될 수 있다. 고전은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시대의 상황에 맞춰 새로운 담론을 생성해낸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조르바라는 고전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욜로의 슬픈 단상, 그 빛과 그림자가 아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