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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주헌 Jun 14. 2020

자존감 강요 사회

무턱대고 나 자신을 사랑하라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겠다는 사람에게 사랑하라는 얘기는 강요다. 사랑할 수 없다는데 왜 사랑하라는 걸까? 내 자신이 내가 부족해보이고 못난 것 같은데 왜 그걸 억지로 부정하라는 걸까? 내 미운 모습조차 정말로 사랑스럽다면 괜찮다. 하지만 정말로 미운 모습을 억지로 사랑할 필요는 없다. 나를 사랑하는 건 스스로 느끼기에 솔직하게 사랑스러워야 가능하다. 그런 내 모습이 있어야 가능하다. 자존감은 상황과 여건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마음가짐 하나 고쳐먹는다 해서, 말투 하나 바꾼다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부터 출발해서 행동이 수반되고, 성과가 이루어졌을 때 차츰 쌓여가는 것이 자존감이다. 친구와 약속을 이뤄가면서 우정이 쌓이듯이, 나와의 약속을 하나하나 지켜나갈 때 쌓이는 것이 자존감이다.


 요즘 일부 서적들은 자존감이 중요하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정작 하는 소리들은 다 뜬구름 잡는 소리다. '자존감 낮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자존감 높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활 패턴' 같은 글들로, 또다시 사람을 고착화된 패턴에 귀속시킨다. 하지만 없던 자존감이 뜬금없이 생기는 일은 없다. 자존감은 나의 모습과 행동이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표를 만족할 때 생긴다. 내가 어느정도 수준이 되어야 만족스러운 나의 모습이라 평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 말이다. 어느정도 경제력, 어느정도 마음씨, 어느정도 외모, 어느정도 능력, 어느정도 평판... 차갑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저런 것들이 삶의 행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세상이다. 못생긴 외모가 콤플렉스인 사람에게 “외모가 다가 아니니 자존감을 갖고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라” 라고 말하는 건 무례한 발언이다. 지금 그 사람에겐 외모가 중요한거다. 대안을 제시하더라도 어느정도 그 사람의 기준을 충족시킨 이후에 시작해야지, 무작정 포기하라고 할 게 아니다. 오히려 우선은 그 사람이 원하는 외모에 다가갈 도움을 주는 것이 맞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누군가에겐 학벌이고 누군가에겐 몸매일 수 있다. 그 기준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 기준을 채우기 위해 나와의 싸움을 시작해 이뤄내면 된다. 이처럼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과 조언은 개개인마다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사람마다 나 자신에게 원하는 기준과 목표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서적이나 미디어는 개개인을 한데 뭉뚱그려 이렇게 말한다. “자존감 낮은 사람들의 특징" 그러고는 이 자존감 키워드에 철학이나 언어학 등의 인문학을 끼워 넣어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그럴 듯 해 보일 뿐이다. 그 사람의 진짜 사정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일례로 한 서적은 자존감 낮은 사람들의 특징이 불합리한 일에 소신껏 말하지 못하고 쭈뼛쭈뼛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철학을 배우면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되며, 곧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는 식의 얘기를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존감이 낮아진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 그 사람이 정말 철학을 배우지 않아서 자존감이 낮아진걸까? 심지어 어줍짢게 배운 철학을 내세우며 당당한 척 사회생활하면 그건 땜질식 처방조차 안 되고 오히려 부작용만 키운다. 이런 식으로 많은 미디어들이 자존감을 상업적 키워드로 여기고, 희귀한 것으로 과대포장해서 사람들을 겁먹게 한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존감 쟁취를 시도하게끔 만들고, 그렇게 수요를 유지한다.


 자존감을 직접 언급하진 않더라도 비슷한 효과를 노리는 류의 서적도 있다. 한마디로 위로 전문가 흉내내는 책들.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거나, 누가 뭐라 해도 괜찮다는 말 등이 단골 표현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사람에게 왜, 행복한 일이 있을테니 찾아보라고 하나. 왜 내가 마음이 넓지 않고 식견이 좁아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투로 말하나. 내 이름 석 자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듣기 좋은 말만 듣고서 일회성으로 힐링된 기분이 근본적으로 무슨 변화를 이끌어내는가. 차라리 솔직하게 자기가 깨지고 구른 얘기를 풀어놓은 책들이 낫다. 그런 책들은 울고 웃고 때론 쓴웃음을 지으며 작가의 삶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 투명한 시선은 곧 나에게로 향하게 되고, 나의 속내를 솔직하게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반면 일회성 힐링에 그치는 책들은 겉의 얼룩을 닦아내는 데에 그친다. 새로운 얼룩이 덮쳤을 때 똑같이 당할 뿐이다. 오히려 이전보다 멘탈이 더 심하게 깨진다. 마음 고쳐먹고 행복하게 지내는 줄 알았는데 전에 겪었던 문제가 또다시 찾아오니까. 그 책들대로 하면 나는 계속 내 감정을 부정하고, 합리화하고, 자기 위안 삼게 될 뿐이다. 


 나를 내려놓게 하는 비현실적 서적들에 안락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나를 끌어올릴 생각을 해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다. 노력해서 도달하거나, 눈을 낮추거나. 근데 눈을 낮추는 건 슬프다. 내가 원하는 삶의 수준을 강제로 낮추는 건 그 자체로 자기부정이다. 세상에 엿을 선사하면 했지 순응하고 낮춰줄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원하는 지표에 도달해야한다. 유명한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입버릇처럼 “일단 해!” "Just do!" 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결국은 도달해야하니까, 움직여야하는 것이다. 인생은 다층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행동을 하면 수많은 갈래를 만나게 된다.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실행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사소하더라도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그 행동이 쌓여가며 다양한 인생의 선택지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찾아온 운을 내다버리기도 하고, 우연히 쟁취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은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생각에만 잠긴 채 살아간다.


 내가 그랬다. 나는 감성과 우울을 구분하지 못하는, 항상 어딘가 슬픈 사람이었다. 새벽엔 노래를 들으며 한 두 시간은 잡생각을 소진해야 잠에 들었다. 그러다 망상을 걷어차 버리고 현실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계속 했더니 바뀌었다. 아마 자존감이란 게 회복된 게 아닐까. 행복할 일을 구태여 찾으려 일상의 미로를, 과거의 기억을 헤집는 것 보다 행복 따지지 않고 움직이는 게 나았다. 내가 나 자신에게 원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목표로 무언가를 시도해보자. 그러다 보면 습관처럼 “난 자존감이 낮아” 라고 말하던 사람들도 어느새 “요즘 이런거 하면서 지내”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차오르는게 자존감이더라. 이제는 자존감을 무언의 압박처럼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레 차오르길 도와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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